전시안내
Cased Tapes Marble, object, 가변 설치, 2025
Cased Tapes Marble, object, 가변 설치, 2025
Numbered Eggst, Painting on plaster 가변 설치, 2025
Numbered Eggst, Painting on plaster 가변 설치, 2025
사드의 가위바위보 Marble 22(h)x70x17.5(cm) 2021
사드의 가위바위보 no.2 Marble, object 26x62x41(cm) 2023
사드의 가위바위보 no.3 Marble, object 30x100x20(cm) 2024
적금, 만기 no.3 Marble, object, 55(h)x35x27(cm) 2019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는 사람들 | 박정우

 

 


 

 

Hakgojae Art Center  
B1F

2025.11.26-12. 2





 

불만족을 충만히 작업하는 법
- 박정우,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는 사람들>

“경멸과 무시는 때로 건강의 징표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i can't get) no satisfaction 

박정우의 작업은 도발적이다. 에너지가 넘친다. 그 에너지는 현실, 곧 현재 사회, 동시대의 인간들 그리고 현재의 지배적 담론에 대한 불만족에서 나오는 것이다. 박정우는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박정우의 작업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천재이거나 천재가 아니고, 나는 위대하거나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다른 누구와도 다른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결국 나는 어떤 경우에도 결국 내 생각을, 나의 작업을 할 뿐이다. 박정우는 예전 선현들의 존경할 만한 태도, 곧 세계를 내 한 몸에 쓸어 담으려는 낮은 자세, 겸손, 덕스러운 사고방식 따위로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그렇다고 박정우가 이런 것들을 전적으로 무시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박정우의 일차적 관심과 태도가 이런 것 위에 놓여 있지 않다는 말이다). 박정우는 젊고, 힘이 있다. 박정우는 바로 이렇게 생각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적고 그렇게 작업할 만큼 용기가 있다. 박정우는 지금 사회의 지배 담론이 맘에 안 든다. 나는 별거 아니지만, 실은 남들도 결국 별거 아니지 않겠는가? 그러니, 나도 내 생각을 말할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박정우는 때로 풍자적으로, 때로 도발적으로, 때로 공격적으로, 그리고 늘 삐딱하게, 작업하고 말한다.

i zimbra/stop making sense

이는 세계와 사물의 질서에 관련된 문제, 말과 사물의 문제, 질서와 순서의 문제, 가치를 부여하는 우선 순위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박정우는 기존의 질서를 뒤틀고 뒤바꾼다. 보통은 패러디, 아이러니, 풍자, 해학 등으로 불린 이러한 기법은 예술과 문학의 영역에서 특히 유용한 작업 장치로 사용되어 왔다. 

달걀 표면에 ‘유통기한’ 일자를 인쇄하는 기계를 직접 구입하여 작업한 <numbered eggs>(숫자가 매겨진 달걀, 2025)에서 박정우는 모든 달걀에 ‘pepper 25/06/12’라는 동일한 번호를 인쇄해 넣었다. 이는 구분을 위한 넘버링이 구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만드는 아이러니의 효과를 노린다. 박정우는 글자와 숫자의 의미를 묻는 나에게, 글자와 숫자 모두 의미가 없으며, 그저 글자 또는 숫자를 새겨 넣음으로써 기존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를 부여한 것이라는 답을 주었다. 결국, 무작위와 무의미에 기초한 이러한 시도는 마치 다다이스트 후고 발이 행한 실험시, <gadji beri bimba>(1917)를 연상케 한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기존의 시스템을 지탱해주던 말과 사물 사이의 일치, 사물의 질서가 무너진다. 전복된다. 결국, 박정우는 퍼포먼스가 아닌 설치 작업을 통해서도 ‘무의미가 없다면 의미가 없음’(there is no sense without non-sense)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이번 전시의 중앙에 메인으로 배치된 <cased tape>(케이스에 넣은 카세트테이프, 2025)는 나무로 된 받침대와 나무로 틀을 만든 유리 상자 안에 대리석으로 성형한 카세트테이프들이 정렬되어 있다. 관객이 카세트테이프라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로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면 상자 안에 수십 마리의 귀뚜라미들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때로 전시장이 조용해지면 귀뚜라미들이 소리를 내어 울기도 하는데, 이 역시 전시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라 관객으로 하여금 ‘기묘한, 관객에 따라 때로는, 역겨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박정우에 따르면, 이 작업은 ‘지속가능성’에 대한 것인데, 케이스 안에 벌레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이 지속가능성에 대해 가장 강렬하게 크게 느끼는 감정인 ‘긴장감’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말한다(예상치 못한 지점은 작가인 박정우 역시 이 귀뚜라미를 매우 괴롭게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바퀴벌레는 너무 징그러워서 못 하겠고 팔지도 않으니 구할 수도 없었지만, 귀뚜라미는 식용으로 대량 구매가 가능하므로 이렇게 결정했는데, 여전히 매우 괴로웠다고 말한다). 이런 긴장감은 ‘지속가능성’이라는 담론 자체가 갖는 자기 모순적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속가능성을 추구하지만 현대 사회의 구조는 여전히 대량생산과 소비의 논리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성을 찾는 과정 자체가 새로운 소비의 원동력이 되고 기존 시스템을 연장하는 방식으로만 논의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변화는 필연적이며, 지금의 체계에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찾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그 자체로 모순적이고 풍자적인 행위일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은 지속가능성이라는 이상이 현재의 시스템에서 과연 실현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현대 사회가 지속 가능성을 논하는 방식이 실상은 대량생산과 소비의 구조를 유지하는 또 다른 형태의 기만일 수 있음을 비판적 시선으로 탐구합니다.”(전시 <에그포칼립스>(Eggpocalypse) 작가의 말, 2025)

박정우의 관심은 철저히 사회과학적 담론을 따라 표현되고, 이는 다시 불가피하게 박정우의 작업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가능케 한다. 이는 잘린 손가락, 눌린 손바닥, 굳게 쥔 주먹 등이 성인 남성 성기 형상들 위 또는 주변에 놓인 매우 도발적인 작업 <사드의 가위바위보>(Rock, paper, scissors of Sade, 2024) 시리즈에서도 여실히 관찰된다. 작업은 ‘자유를 말하지만, 실은 자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한히 자유롭지만 실은 전혀 자유롭지 않은’ 상황 자체에 대한 시(각)적 은유이다. 이는, 구조든 시스템이든, 개인이 사실상 전혀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 불가항력적 힘에 의한 강제와 구속을 (블랙) 유머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권력과 성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사회의 지배와 관리의 장치로서의 관념, 도덕, 윤리에 대한 시각적 비유로 읽힐 수 있다. 박정우는 외적 강제와 억압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개인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자발적으로 행하는, 자유로운’ 선택임을 정확히 알고 있다. 거시적인 외적 통제보다 미시적인 내적 관리가 더 근본적이고 강력한 지배의 형식이다.

<적금, 만기>(Installment savings and maturity, 2023) 시리즈 역시 마찬가지로 어떤 인간도 피해 갈 수 없는 상황을 ‘노화(老化)에 따른 발기 부전’에 빗대어 인간(남성)의 욕망과 위선의 ‘희비극’을 성적 풍자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박정우의 이런 작업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러한 사태에 대한 보는 이의 의식 자체이다. 의식되기 전에 모든 것은 의식되지 못한 상태 곧 무의식의 법칙을 따라 자동화ㆍ조건화되면서 우리의 느낌과 인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박정우는 타인들의 이러한 희비극을 자신을 되돌아보는 타산지석으로 바라본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작가의 이런 눈길이 ‘다 같이 성찰하고 함께 반성하자’는 식의 ‘도덕주의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자기 변형을 향한 주체화의 기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박정우의 작업이 노리는 최종 효과는 지금의 질서와는 살짝 어긋나는 다른 길, 나와 세계를 지금과는 ‘달리 볼 수 있을 새로운 눈길’, 곧 세계의 다른 질서를 구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POWER

그런데, 이처럼 세계의 다른 질서를 꿈꾸는 것,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눈길을 찾으려는 이런 시도를 우리는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이라 부르지 않는가? 정치적인 것이란 결국 권력의 문제이다. 거듭 말하듯이, 박정우의 작업 논리와 형상은 세계 또는 한국 사회의 기존 작업과 ‘조금’ 다르다. 그리고 이 조금이 ‘모든 것’을 달리 바라보게 만든다. 박정우는 기존에 이미 성립되어 있는(旣成) 작업이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심미적 감성과 논리 자체에 ‘약간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는, 랑시에르가 말하듯, 감성적인 것의 ‘새로운’ 분할에 다름 아니다. 감성과 정치란 실은 나뉠 수 없는 것이다. 나뉠 수 없는 감성과 정치를 나누는 것, 둘 사이에 관련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 심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다르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이다.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아름다운 것과 아름다움 자체를 일치시키고자 한다. 일치를 향한 의지는 아름다움의 정의와 기능에 관련된 해석의 독점을 수반한다. 따라서,  심미적 미감은, 당사자가 알든 모르든 인정하든 아니든, 이미 그 자체로 늘 정치적이다. 

박정우의 시각적 작업, 곧 조형 작업은 미학적으로 매우 정교한 기술적 완성도를 보여주며, 사실상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다(박정우는 뛰어난 테크니션이다. 자칫 잘못했다면, 박정우의 작업은 쉽게 기교에 파묻혀 정작 ‘작업’이 보이지 않는 위험을 발생시켰을 것이다). 반면, 박정우가 작업의 또 다른 일부로서 구사하는 담론은 일정한 (체제) 전복성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한도 내에서 정치적이다. 이때 박정우의 작업은 권력투쟁과 분리 불가능하다. 감성의 분할이란 미감이 곧 정치적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박정우의 두 작업 영역, 곧 보수적 이미지와 전복적 담론 사이, 형식과 담론 사이의 괴리는 젊은 작가 박정우가 앞으로 대면해야 할 문제다. 문제는 문제의식이다. 문제의식의 결여는 예술의, 정치의, 삶과 젊음의 죽음이다. 젊음이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 보다 적나라하게는 감각의 문제,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에 반응하는 육체적 즉각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문제에 대한 명료한 의식 역시 작업의 필수적 요건이다. 의식, 곧 문제의식 없이 오로지 직관과 감각만으로 유의미한 작업을 지속해 나가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sexx laws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육체적 즉각성, 곧 감각적 쾌락은 대부분 ‘말초적 감각에 탐닉한다, 무분별한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식으로 단죄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불성설이다. 육체가 없는 인간을 상상할 수 없고, 인간의 육체란 감각의 집적체인데, 감각을 부정한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정우는 감각, 곧 육체적 감각을 긍정하고 그 위에 자신의 새로운 질서를 쌓아 올린다. 육체와 감각 그리고 성에 대해서도 박정우는 자신만의 고유한 느낌과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한다. 

박정우는 얼핏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의 향연처럼 보이는 사디즘에서 섹스를 돈으로 바꾸면 사드의 작업은 곧 현대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의 폭력적 현실에 대한 풍자이자 고발이 된다는 것을 이해할 만큼 지적이고, 세계의 드러난 표면 아래 놓여 있는 권력관계, 지배와 복종, 착취의 메커니즘을 꿰뚫어 볼 만큼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박정우의 작업은 성과 돈(자본주의)과 권력이 분리불가능한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사실을 명료히 보여준다. 박정우는 바로 이러한 기존의 관념을 파괴한다. 박정우의 도발적 특성은, 권력의 문제에서, 그리고 성적인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도덕적인 문제 중에 성 또는 권력에 연관되지 않은 것이 있을까? 성과 권력은 사회의 지배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두 개의 장이다.”(미셸 푸코)

이는 21세기의 대한민국이 - 이 땅에 도래한 지 이미 적어도 1,6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 불교와 유가의 도덕주의적 관념을 여전히 고수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19-20세기에 수입된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주의의 도덕주의적 측면 역시 이러한 상황을 악화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박정우는 여전히 이른바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다른 이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나를 긍정한다. 박정우에게는 이견, 불만족, 비공감, 도발, 풍자, 공격성 등 니체가 상찬한 건강한 성격의 특성들이 골고루 보인다. 비딱함과 불손함은 때로, 성실과 겸손 만큼이나, 건강의 징표이다. 기존 체계에 대한 청년 박정우의 불신과 불만족은 박정우의 도덕적 게으름이나 ‘결함’이 아니라, ‘불합리적인 것을 부정하고 무시할 만큼’ 박정우의 이성이 성숙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no) way out

박정우는 순진하여 무모하거나, 순수하여 용기 있거나, 영악하여 전략적이거나, 진실하여 전략이 전혀 없거나, 혹은 아마도, 이 모두 다이다. 박정우는 모순을 느끼고 알지만, 다른 모든 동시대의 평범한 청년들처럼, 해결하지 못한다. 따라서, 나이와도 상관없이, 박정우는 ‘젊음’이다. 젊음이란 영원한 부적응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박정우는 적응, 타협 또는 잘 길들여진 상태에 대한 - 본의 또는 본의 아닌, 아마도 둘 모두일 - 어떤 거부를 상징한다. 하지만, 박정우의 작업을 기성 사회, 기득권에 대한 도덕적 풍자 또는 비판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물론 박정우의 작업에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도덕(주의)적 관점은 박정우 작업의 본령이 아니다. 박정우의 작업은 기존 질서에 대한 대책 없는 불만족이다. 이를 도덕적 분노와 미래를 설계하는 어떤 체계적이고도 유토피아적인 저항으로 읽기보다는, 니체와 들뢰즈ㆍ푸코가 말하는, 힘-관계(relations de pouvoir)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 이는 체계적ㆍ철학적 저항이라기보다는, 어떤 시스템에 의해서도 정형화될 수 없는 ‘원초적’ 생명력의 발현이다. 박정우를 철학화ㆍ문학화ㆍ미학화시키는 것은 박정우 작업의 특정 측면을 정리ㆍ기록하는 데에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필연적으로 오류이다. 근본적으로 어떤 틀 안에 넣어 가둘 수 없는 것을 특정 틀 안에 넣는 일은, 폭력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박정우의 도발적 담론은 결코 자신의 작업을 안정화시키지 않는다/못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안정화, 곧 특정 틀 안에 포획되어서는 안 된다/될 수 없다. 박정우 자신도 이를 잘 알고 있다.  

“혼돈(混沌)에는 얼굴이 없었다고 한다. 숙(儵)왕과 홀(忽)왕이 은혜를 갚기 위해 혼돈에게 ‘일곱 개의 구멍(눈, 코, 잎, 귀)을 만들어주자’고 제안했고,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주자 일곱째 날, 혼돈은 죽었다.”(전시 <에그포칼립스>(2025)의 작가노트.)

<작가노트>에 담긴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 편의 인용은 박정우가 자기 작업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1940년대 중반 철학자 레비나스의 데포르마시옹(déformation)이나, 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1950년대 초의 앵포르멜(informel)보다는, 보다 원초적인 (니체적ㆍ디오니소스적) 에너지의 발산을 말하는 1930년대 문화인류학자ㆍ문명비평가 바타유의 비정형(非定型, informe) 개념에 더 가깝다. 부적응과 불만족의 원초적 에너지는 그때그때 자신에게 합당한 매번의 형상을 가질 뿐 어떤 확정된 형식 아래 초월적으로 고정될 수가 없다. <현재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현재를 살지 못하는 것은 불완전한 현실을 살지 않고, 완전한 관념으로 도피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관념은 과거이거나 미래이거나, 또는 법칙이거나 진리와 같은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은 현재를 살지 못한다. 현재를 한계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한계를 극복하려는 방식으로 미래와 과거와 법칙과 진리를 꿈꾸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을 다 사는 것, 불완전을 충만하게 사는 것이라는 점을 모른다. 그들은 인간의 할 일이란 한계를 극복하는 일이 아니라, 한계를 다 사는 일임을 모른다. 아도르노를 따르자면, 그들은 ‘불만족에 머무르는 법’을 모른다. 박정우는 자신의 한계를 조건으로 삼아, 나의 오늘, 우리의 여기를 작업한다. 참으로, 불완전과 비정형, 오늘과 여기만이 ‘현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그릇, 아니, 빚어낼 수 있는 틀이다.

허경ㆍ철학학교 혜윰
https://blog.naver.com/rendezvous00





작가노트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는 사람들

만기에 도달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개인적인 용무로 한 사장님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곳은 높은 담장과 가파른 비탈길 위에 자리한, 부를 과시하는 동네였다. 대문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작은 정원과 2층 주택이 보였다. 집은 당시 유행하던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되어 있었고, 마당은 일본식 정원을 모방한 듯한 구조였다. 그러나 세련됨보다는 어색하고 조잡하다는 느낌이 가득했다. 값비싼 소나무는 아름다움보다는 공간을 억누르고 있었고, 여기저기 흩어진 조각 작품들은 아무리 ‘의도’를 부여해 보아도 정돈되지 못한 인상을 주었다. 마당 중앙에 서 있는 문 없는 문틀과, 어울리지 않는 맷돌 발판은 그 과잉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옆에 붙은 작업실 역시 겉으로는 창작의 공간을 흉내냈지만, 실상은 잡다한 창고에 가까웠다.
그 공간은 누군가의 소중한 집이자 인생의 결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속상한’ 저 집을 생각하면, 감각 역시 근육과 같아서, 적절한 시기에 발달시키지 못하면 세련되지 않은 취향에서 벗어날 수 없나보다. 이 기억은 오래도록 남아 나중에 〈적금, 만기 no. 3〉의 이미지로 이어졌다. 나이가 들어 발기되지 않는 성기에 어떻게든 자극을 주려 애쓰는 몸짓처럼, ‘만기’에 이른 어떤 삶의 모습을 만난 적이 있었다.

〈적금, 만기〉는 과거와 미래, 고통과 희망, 희생과 보상을 동시에 품고 있는 상징적인 제목이다. 이 작품은 인간이 스스로 ‘안정’이라 부르는 구조 안에서 어떻게 현재를 잃어버리는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적금과 만기라는 개념은 계획과 대비 그리고 미래의 안정을 전제하지만, 그 자체가 지금 이 순간의 부재를 전제한 언어이기도 하다. 작품 속 이미지들은 과거와 미래를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그 사이에 존재해야 할 ‘현재’가 실질적으로 비어 있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내가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불현듯 찾아오는 감정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었다. 아무 일이 없는 순간에도, 편안함 속에서도 스며드는 걱정, 긴장, 짜증 같은 고통의 감정은 외부 자극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자리 잡은 어떤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구조는 늘 ‘과거를 되새기고 미래를 대비하려는’ 습관적인 사고였다. 과거와 미래에 시선을 빼앗긴 채, 현재를 충분히 ‘살지’ 못하는 상태는 나에게 불안을 남겼다. 〈적금, 만기〉는 이런 모순을 이미지로 표현한 작품이다. 우리가 안전이라 믿는 것들이 사실은 불안을 증식시키는 장치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장치가 어떻게 현재를 공백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시각적 언어로 보여준다. 이 작품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언가를 쌓고 기다리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쉽게 현재를 비워내는지, 그로부터 비롯되는 불안을 어떻게 우리가 내면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사드의 가위바위보>는 <적금, 만기>의 다른 양상이다.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전 작업이었다면, 새 작업에서는 현재를 조금 더 강조하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다. 제목에서 보이듯이 <사드의 가위바위보>는 사드후작의 소설 『소돔 120일』에서 영향을 받았다. 오랫동안 금서로 취급받았다는 점이 궁금해서 별생각 없이 읽어본 책이었는데 10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왜 금서인지 알았다. 비위가 강한 편인 내가 읽기 힘든 걸 보면 대부분의 독자는 끝까지 읽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이 책이 다시 출판되어 대중이 접할 수 있게 된 까닭은 극단적인 폭력과 성적 타락을 묘사하는 이 작품이 인간의 본성과 권력의 관계에 대해 다룬다는 현대의 재평가 덕분이다. 비평가들은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어두운 면, 본성과 권력에 대한 탐구와 질문을 하게 된다지만, 나는 이 소설을 현실을 리얼하게 표현한 사실주의 소설이라 부르고 싶다. 내가 파란불에 횡단보도를 건너가면 저 차는 과연 멈춰 줄까? 인사를 하면 저 사람이 받아줄까? 이 바닥이 무너지지 않고 나를 지탱해 줄까?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누구나 한 번쯤 의문을 품게 되는 시기가 온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뭉크의 <절망>을 이해(감상)했다. 자신이 이상적으로 혹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세상과 실제 세상 사이의 괴리감으로 눈앞의 모든 것이 일그러져 보였던 뭉크처럼, <사드의 가위바위보>는 욕망으로 가득 찬 리베르탱(libertin)인 내가 보는 세상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