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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COMING_조승규 | 디아판네 Diaphane
Hakgojae Artcenter B1F
2026. 10. 19 - 10. 26
겹침의 붓질이 축조한 시간의 성소: 조승규의 회화가 증언하는 존재의 숙명
이진명, 홍익대학교 초빙교수
조승규의 회화는 캔버스라는 빈 화면을 하나의 독립된 세계로 설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작업이 르네상스 이후 교회 벽화의 도상학적 전통과 장엄한 규모에 닿아 있다는 점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과거의 거장들이 이상적이고 숭고한 아름다움만을 그리려 했던 것과 달리, 조승규는 동식물과 인간, 그리고 인간이 만든 사물이 뒤섞인 세속으로부터 숭고미를 찾아낸다고 보았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막스 폰 뷰트너의 탁견이다. 뷰트너는 작가의 화면이 천국과 지옥, 신과 인간, 욕망과 희생 같은 이분법적 구도를 지니며, 그 이분법이 부분의 형태 안에서도 되풀이된다고 분석한다.
이 진단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30년의 작업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이번 전시 앞에서, 필자는 한 가지 질문을 덧붙이고 싶다. 그토록 많은 대립과 형상으로 가득 찼던 화면이 어째서 마침내 아무도 없는 숲에 이르렀는가. 이 글은 그 물음을 겹침과 투과, 그리고 비움이라는 세 단계로 따라가 보려 한다.
조승규의 화면을 시각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엷은 붓질을 여러 번 겹쳐 올리는 특유의 화법이다. 화폭은 미세한 얼룩과 촉각적인 붓 자국으로 빽빽하다. 붓질의 층은 그 자체로 시간의 퇴적이다. 한 번의 붓질 위에 다음 붓질이 올라갈 때, 아래층은 지워지지 않고 비쳐 보인다. 조승규에게 정체성이란 단일한 표면이 아니라 이렇게 기억의 편린(片鱗)이 겹친 상태이다.
1990년대 초 독일에서 그린 책 드로잉 연작 <두 영토 사이에서(Zwischen zwei Territorien)>(1991)는 이 방법론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펼친 책의 한쪽 면은 비워 두고, 다른 면에 인쇄물과 사진 조각을 붙인 뒤 목탄과 구아슈로 덮었다. 사진은 물감 아래로 가라앉고, 물감은 사진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다. 겹침은 처음부터 감춤과 드러남이 동시에 일어나는 장소였다. 2000년 전후의 대작들에서 이 관념적 화면은 구체적 사물을 통해 현실감을 얻는다. <라움(Raum)>(2000)의 바닥을 가로지르는 노란 전선, <아쿠아리움>(1999)의 유리 수조, <디아판네>(2000)의 피아노가 그렇다. 이 사물들은 몽환적인 공간에 닻을 내리는 장치로서 현실과 비현실이 경계 없이 한 평면에 놓이게 한다.
조승규의 연대기에서 첫 번째 도약은 <디아판네(Diaphane)> 연작이다. 미술평론가 이경모는 이 단어를 자연광이 창문을 통해 실내에 비치며 전개되는 빛의 상황 변화를 뜻하는 건축 용어로 소개하고, 조승규에게 그것이 형식이자 곧 주제였다고 정리한 바 있다. 이 개념의 뿌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디아판’이라는 말을 미술사의 용어로 정착시킨 이는 독일의 미술사학자 한스 얀첸(Hans Jantzen)이다. 그는 1927년의 논문 「고딕 교회 공간에 대하여」에서 고딕 성당의 내부가 ‘디아판 구조(diaphane Struktur)’를 지닌다고 보았다. 얀첸에게 고딕의 벽은 공간을 막는 덩어리가 아니라, 빛으로 채워진 배경막 앞에 세워진 조형적 형태들의 격자였다. 벽은 빛을 차단하지 않고, 빛을 등지고 서서 빛을 드러낸다.
이 관점으로 보면 조승규의 화면 구조가 한층 선명해진다. 그의 그림에는 거의 언제나 수직의 선들이 화면 앞쪽을 가로막고 서 있다. <디아판네 문 앞에서>(2000)와 <디아판네>(2000)에서는 가느다란 흰 줄기들이 화면을 세로로 분할하고, 그 뒤로 인물과 동물, 피아노가 비쳐 보인다. <라움>의 유리 상자와 원통형 거울은 그 안의 존재를 가두는 동시에 투명하게 내보인다. 앞쪽의 격자와 뒤쪽의 빛나는 층, 이것이 조승규 회화의 기본 문법이다.
2002년부터 이어진 <빛 모으기> 연작은 이 문법 안에 한 인물을 세운다. 남자는 거대한 노란 원반 곁에 서 있거나(2002), 연둣빛 웅덩이 가장자리에 엎드려 있거나(<빛 모으기-2>, 2005), 꽃밭에 얼굴을 묻고 누워 있다(<빛 모으기-3>, 2005). 그는 빛을 붙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빛 곁에 머물려 한다. 빛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몸짓, 그것은 진실에 다가갈지언정 이룰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빛을 매개체로 존재들의 관계를 탐구하던 사유는 같은 시기 <비블리오텍(Bibliothek)> 연작에서 책이라는 사물로 옮겨 간다. <푸른 책꽂이>(1998)는 책장 전체를 푸른색 하나로 칠했고,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제작된 <비블리오텍 – 새를 위한 도서관>은 책등(book spine)만을 수직으로 늘어놓은 패널들을 이어 붙여 전시장 벽을 가로지르는 긴 띠를 만들었다. 제목을 상실한 책등들은 지식의 목록이 아니라 순수한 수직의 리듬이 된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이어진 소품 연작 곁에 작가는 파쇄된 폐기 화폐를 나무틀 안에 산처럼 쌓은 <지본 놀이터>와 같은 파쇄 지폐를 손수레에 담고 ‘Korruption(부패)’이라 새긴 <수레>를 놓았다. 책도 지폐도 결국 종이이고, 종이는 나무에서 왔다. 잘게 부서진 지폐 더미는 낙엽의 퇴적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2020년의 <숲>에는 잿가루가 섞인다. 책장에서 파쇄 지폐로, 다시 재로. 숲은 비유로만 도착한 것이 아니라, 종이와 재라는 물질을 거쳐 실제로 화면에 돌아왔다.
2019년 이후의 <숲(Der Wald)> 연작 앞에서 관객이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부재이다. 인물이 없다. 말도, 피아노도, 유리 상자도 없다. 30년 가까이 화면을 채웠던 군상과 사물이 모두 빠져나가고, 위에서 아래로 곧게 선 나무줄기들과 그 사이의 색 조각들만 남았다. <숲> 연작은 인간과 동식물이 경계 없이 하나로 호흡하는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실현한다. 존재들을 한 화면에 모아 놓는 대신, 존재들이 떠난 자리를 남긴다. 필자는 이것을 포기가 아니라 완성이라고 본다. 모든 형상이 빠져나간 뒤에도 그들 사이의 관계성은 사라지지 않고, 수직으로 반복되는 리듬으로 화면에 남아 있다. 여기서 디아판 구조가 가장 순수한 형태로 드러난다. 얀첸이 고딕 성당에서 본 것, 즉 빛으로 채워진 배경막 앞에 선 형태들의 격자가 바로 이 숲의 구조이다. 나무줄기들은 앞쪽에서 격자를 이루고, 그 사이로 보랏빛과 청록과 황토의 층이 빛처럼 비쳐 나온다. 과거 화면 앞쪽을 나누던 가느다란 줄기들이 이제 화면 전체가 되었다. 그동안 그 격자 뒤에 서 있던 인물과 동물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빛 자체가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이다.
<숲 – 음, 양>(2020)은 이 비움의 논리를 구조적으로 보여준다. 화면은 황톳빛의 따뜻한 숲과 짙은 청색의 서늘한 숲으로 나뉜다. 두 숲은 같은 줄기의 리듬을 공유하면서 색의 온도만 다르다. 1991년의 <두 영토 사이에서>, 1999년의 <두 개의 땅으로 들어감>에서 긴장으로 맞서던 두 영역이 여기서는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맞닿아 하나의 숲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 숲은 텅 빈 풍경이 아니라 하나의 성소(聖所)이다. 고딕 성당이 빛을 들이기 위해 벽을 비웠듯, 조승규는 빛을 들이기 위해 화면을 비웠다. 2022년 한국은행 본점 로비에 걸린 두 점의 <숲>(330×360cm)은 대리석과 유리의 건축 공간 한가운데에 그런 빛의 벽을 하나 더 세운다. 22년 전인 2000년, 하노버 주립중앙은행에 영구 설치된 <das Blatt – 나뭇잎, 퇴적의 의미>가 어둠 속에 인간과 동물을 빽빽하게 쌓아 올린 화면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두 은행 사이의 거리가 곧 이 화가가 걸어온 비움의 거리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네이버 계시록>은 이 고요한 흐름 속에서 가장 도발적인 작품이다. 포털 사이트를 상징하는 연초록으로 뒤덮인 화면 한가운데 로고가 흰 글자로 박혀 있고, 그 주위로 성당과 의자, 동물, 조각상이 초록 물감 속에 반쯤 잠겨 있다. ‘계시록’이라는 제목은 교회 프로젝트 이래 이어진 종교적 도상학을 동시대 정보 환경으로 옮겨 놓는다.
디아판 구조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의 아이러니는 더 날카로워진다. 중세인에게 세계를 비춰 보여주던 막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였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그 역할을 하는 것은 화면 속 검색창이다. 그러나 스테인드글라스가 빛을 들여보냈던 것과 달리, 검색창은 빛을 내뿜으며 그 뒤의 세계를 가린다. 성당과 동물과 조각상이 초록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조승규는 투과의 화면을 30년간 그려 온 화가로서, 투과하지 않는 막의 시대를 진단한다. 그것은 우리가 발 딛고 선 동시대의 계시록이다.
이미지가 대량으로 생산되고 즉각적으로 복제되는 시대에, 조승규는 대중을 도발하는 아방가르드의 길 대신 회화의 전통과 물리적 노동, 그리고 회화 고유의 시간성을 택했다. 이번 전시회는 작가가 감당해 온 그 숙명의 궤적이 겹침에서 투과로, 투과에서 비움으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붓질을 겹쳐 시간을 쌓았고, 쌓인 층 사이로 빛이 통과하게 했으며, 마침내 빛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숲을 세웠다. 그 숲은 형상의 부재가 아니라 관계의 완성이다.
조승규가 축조한 시간의 성소이자 사유의 숲은 속도에 눈멀어 가던 우리에게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무겁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게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고 “어디로 향해 가는가?” 그의 회화는 수많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짜인 우리 자신의 역사를 시각으로 구성한 조형적 서사이자 사유의 빛이 드나드는 숲의 빈터(Lichtung)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