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안내
UPCOMING : 별이 없는 밤에는 달이뜨고, 달이 없는 밤에는 별빛이 내린다. | 윤의진
Hakgojae Art Center
B1F
2025.11.5-11.8
‘나’를 돌보면서 ‘나’를 드러내는 풍경들
정윤선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지만, 때로는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의문이 앞장서서 그것을 해야 할 이유를 찾아주기도 한다. 그 의문은 그 행위에 대한 회의를 담고 있음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것을 해야만 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시때때로 스스로에게 묻는 자기 안의 어떤 자문관은 증거를 요구한다. 그러나 여기 필요한 것은 증거가 아닌 확신이다. 증거는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확신은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지난한 삶을 왜 지속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문장은 ‘이런 어둠 속에서’, ‘이렇게 약한데도 불구하고’라는 수식어를 주머니 속에 몰래 넣어놓고 틈틈이 매만진다. 윤의진은 그 의문이 떠오를 때면 곁에 있는 존재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의 곁에서 몸을 늘어뜨리고 자고 있는 고양이들에게는 자신을 닮은 데가 있었다. 너무 약한 몸, 놀라기 쉬운 마음, 대단한 용도가 없는 것. 하지만 그러한 모습으로도 충분한 존재들. 작가는 그의 작업에 고양이와 버드나무, 초승달처럼 그를 닮은 것들을 초대한다. 그들을 그려내는 것은 약하거나, 어둠 속에서 원의 반의 반쪽짜리로 빛나는 ‘나’를 닮은 무언가를 통해 ‘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청량한 나무와는 다른, 오직 두 팔을 늘어뜨린 버드나무만이 가진 아름다움을 그려낸다.
자신의 어둠을 들여다보고 그 어둠을 하나씩 꺼내어 나누는 과정을 지나온 작가는, 2025년에 접어들면서 ‘어둠을 있게 하는 빛’을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어둠을 알아볼 수 있다는 건 반드시 그 주변에 빛이 나란히 있다는 뜻이다. 어둠의 형체에 몰입했던 그는 이제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삶을 선명하게 만드는 데에 집중한다. 〈내가 길러온 숲은 I〉과 〈내가 길러온 숲은 II〉, 〈불안이 사라진 자리에는〉을 비롯한 그의 작업에는 그라데이션을 통해 연결된 빛과 어둠이 담겨 있다. 한편으로 그는 삶의 풍경을 선명하게 그려낼 뿐만 아니라, 삶의 선명함을 그림을 그림으로써 체화한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재료인 한지는 동양화 물감을 마치 염색하듯 액체 상태 그대로 흡수한다. 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그림을 그린 사람은 그 얇은 한 장의 종이가 어느 만큼의 물감을 머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작가는 덧칠을 거듭하면서, 종이가 흡수한 농도의 기억을 자신의 몸에 남긴다. 작업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뚜렷해지는 세필로 그린 선 역시, 화판을 채우는 밀도의 기억을 작가의 몸에 남긴다. 〈포기할 수 없는 나 II〉와 〈희망을 찾는 방법〉 작업을 통해 그 과정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삶의 풍경을 선명하게 포착할 뿐만 아니라, ‘나’의 살아있음을 선명하게 느낀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하는 작가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단단한 토대를 만들어 주는 것이기도 하고, 매일 되뇌고 어루만져도 화해하지 못한 마음을 돌보는 일이기도 하며, 살아갈 이유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그는 그림을 통해 ‘나’를 돌보면서, ‘나’를 세상에 드러낸다. 윤의진에게 작업을 한다는 것은 나 스스로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일이다.
작가노트
1.
나는 삶이 이해되지는 않는 사람. 왜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나에게 내가 없었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되었더라. 늘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기차를 타고 가다가 문득 나는 나를 위해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나에게 대단한 걸 주진 못했지만, 살아서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 변하지 않는 사실이 구원이었음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미워서, 늘 견딜 수 없어서 버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않고 가장 좋아하는 한 가지를 끝까지 하게 해 주었구나.
아무리 도망가도 머리 위로 비추는 달을 떼어 낼 수 없는 것처럼, 조용히 나를 비추고, 재촉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때부터 달은 외면할 수 없는 나였다. 나를 지켜봐 주고, 곁에 있어 준 진실한 나.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달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사람은 스스로를 속일 수는 있어도, 아주 어릴 적 순수함과 진실함으로 만들어진 자아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만약 나쁜 짓을 저지른다면, 나의 최초의 자아는 그것을 틀림없이 모두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자아는 상처 입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그 자아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그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 그렇게 방향을 찾아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니…
삶은 인간을 비웃는 것처럼 허무와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가져다준다. 그래서 좀 분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고 그림을 그려서 앞으로 가고자 한다.
부디 더 나은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2.
고양이의, 아니 반려동물의 사랑은 인간의 언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은 근거를 찾다 보면 몇 가지는 나오기 마련인데, 그네들의 사랑에는 그런 것이 없다. 동물들은 내가 무엇을 해줬고, 어떤 사람이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마땅히 사랑한다는 듯이 사랑한다.
고양이의 몸에 가만히 얼굴을 묻고 그를 느끼고 있노라면 점점 ‘나’라는 경계가 희미해진다. 살면서 노력하고 성장해서 만들어 놓은 내가 마치 나무나 구름처럼 물렁해져서 자연의 구성원이 된 것 같다. 나도 고양이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운 어떤 것이 된다. 그게 너무 사랑스럽고 고마워서 고양이를 살뜰히 아끼면, 이상하게 그 손길이 내게로 돌아온다. 내가 나를 살피고 쓰다듬는다.
마치 수면 위에 비춘 것처럼 되돌아오는 갸륵한 마음. 이 관계를 나는 여태 이해하지 못한다.
버드나무처럼 겹겹이 감싸 숲을 만들고,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달을 바라보는 것이 ‘나’를 완성하기 위함이라면, 고양이는 무엇일까. 그네들의 사랑은 왜 매일 나를 부끄럽게 만들까.
3.
삶과 죽음, 기쁨과 고통, 빛과 어둠의 간극을 이어주는 것은 용서이다.
용서는 끔찍함과 황홀함의 얼굴을 모두 가졌다. 괴로움을 이해하고 보내 주어야만 즐거움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세상이 잔인한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는 건 용서를 배우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용서가 지닌 좋은 점은, 그 끝에 아직 누구도 겪어 보지 못한 자유와 평화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수많은 기도와 원망, 애원과 비참함을 견뎌야 하는 것이
나는 정말로 정말로
아주 고약한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