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안내
UPCOMING_김혜성 | Planet-Alocasia, She
Hakgojae Art center
2025.6.10 - 6.24
발화되지 않은 것들의 언어, 그림자는 말한다
김혜성의 회화적 사유- Planet-Alocasia, She, 꽃, Pierrot
서(序): 존재는 어떻게 발화되는가
이 전시는 네 개의 형상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별-알로카시아, 그녀-옷, 꽃, 피에로. 이들은 생명과 기억, 감정과 주체의 층위를 따라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건넨다. 그러나 그 말은 직접적이지 않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 솟아나고, 그림자에서 응시 되며, 화면의 여백 속에서 스며든다. 이 작업은 보이지 않던 감정의 구조, 발화되지 못했던 존재의 감각을 하나의 회화적 언어로 전환시키며, 말이 될 수 없는 것들의 언어를 조형적으로 표현한다.
1.
별–알로카시아Planet–Alocasia : 빛과 그림자, 그리고 시간의 식물학
알로카시아. 여리디여린 줄기는 맑은 공기 속에서 낭창하게 솟아 있다. 하늘을 향해 뻗은 푸른 선, 수직의 줄기. 그 선이 끝나는 자리에서 하트 모양의 잎이 열린다. 잎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줄기는 아래로, 부드럽게 휘어진다. 반듯하면서도 섬세한 곡선. 직선이면서 동시에 곡선을 지닌 푸른빛의 식물. 알로카시아는 그 가느다란 선을 따라 자신의 키를 키워간다. 옅은 그림자 하나를 남기며, 소리 없이 자란다.
흔들리는 키 큰 줄기 아래, 작게 솟아나는 잎에도 햇빛은 고루 스며든다. 음악처럼, 빛은 식물의 결을 따라 흐르고, 솟구치게 하며, 수직의 키를 더해간다. 자신 몸에 닿은 빛을 조용히 흡수한 알로카시아. 그는 지금, 빛으로 충만한 생명체가 된다. 별빛이 내려 스민 알로카시아, 그 푸른 잎. 찬란한 녹색. 이 순간의 생은 녹색의 환한 빛으로 타오르고 있다.
화면 위에서 알로카시아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다. 시간과 빛, 존재와 감각을 통과하며 변화하는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다. 화면 중심에 놓인 알로카시아는 스스로를 빛으로 키우고, 그림자로 흔들리며, 존재의 리듬을 조용히 기록해 간다. 그것은 김혜성의 호흡과 시선이 녹아든 정원이자, 작가의 감각이 펼쳐지는 하나의 생태적 화면이다. 이 작업은 시각적 묘사를 넘어 시간의 결을 드러내는 조형적 실험이며, 식물이라는 타자를 통해 인간의 시간 인식과 공간 감각을 흔들어 놓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작용한다.
‘Planet–Alocasia’에서 ‘별(planet)’이라는 단어는 거창한 은유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은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자리, 곧 지구라는 행성의 감각을 환기한다. 알로카시아는 이 별 위에 살아가는 존재의 방식이며, 거대한 우주의 질서 속에서 미세하게 떨고 있는 생의 한 점이다. 이 식물의 여린 떨림 속에서 작가는 코스모스(cosmos)의 리듬을 본다. 식물이라는 작은 입자 안에 시간의 순환과 빛의 흐름, 그림자의 기억이 은은하게 감기고, 흐르고, 사라진다.
이러한 감각은 화면 아래에 놓인 쌀을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작가는 알로카시아를 그리기 이전에, 먼저 쌀을 붙인다. 말하자면, 쌀 위에 알로카시아를 심는다. 쌀은 단지 하나의 곡물만이 아니다. 고정된 구조나 기능으로 설명될 수 없고, 정해진 형상 없이 떠도는 감각의 씨앗처럼, 일종의 ‘기관 없는 신체’로 존재한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 아직 피어나지 않은 감정의 잠재태로, 쌀알 하나하나는 작고 투명한 시간의 입자이며, 감각과 기억의 표면을 간신히 가로지르며, 보이지 않는 존재를 촉각화 한다. 회화의 물질성과 시간의 추상성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쌀은 생명의 기호로 다시 태어난다.
쌀은 사라진 것을 담고 있으며, 곧 피어날 것을 품고 있고, 아직 되지 않은 시간을 조용히 기다린다. 빛과 그림자, 알로카시아의 줄기와 잎, 그리고 쌀로 이루어진 이 화면은 말해지지 않은 말들의 여백이자, 사라짐의 감각이며, 존재의 한때를 부드럽게 기록하는 장이 된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빛과 그림자의 관계이다. 이 작업에서 빛은 단순히 외부에서 비추는 물리적 요소가 아니다. 빛은 식물의 몸을 통과하며 존재의 표면을 형성하고, 그 흔적은 그림자로 남는다. 그러나 이 그림자는 단순한 어둠이나 부재의 표시가 아니다. 김혜성은 그림자의 여린 표면에 자개와 한지를 얹는다. 빛을 머금은 그림자는 단순한 반영을 넘어, 스스로 육화(肉化)된 물질이 된다. 보는 이는 그 흔들리는 층 위를 건넌다. 사라지는 것과 드러나는 것 사이, 숨죽인 틈을 더듬으며, 존재의 숨결을 듣는다.
그림자는 더 이상 대상의 흔적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의 사물로서, 실체로서 회화의 중심에 개입한다. 이로써 그림자는 빛에 의한 부산물이나 덧붙은 그림이 아니라, 실재와 순환하며 존재의 이면을 드러내는 중심적인 형상이 된다. 이러한 순환은 안과 밖, 표면과 이면, 실체와 흔적 사이의 위계를 무너뜨리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경계 없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바로 이 점에서, ‘별–알로카시아’는 하나의 식물적 형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빛과 그림자, 실재와 환영, 존재와 비존재가 순환하며, 하나의 우주적 구조를 형성한다. 알로카시아의 줄기와 잎, 쌀의 입자, 그리고 그림자의 물질화는 이 모든 층위를 교차시키며, 회화의 경계를 넘어선 사유의 장으로 확장된다.
2.
She – 발화되는 몸, 말이 된 옷
“여성의 몸은 언제나 남성의 시선에 의해 정의되어 왔다. 그러나 여성은 단지 그 시선의 대상이 아니라, 또 하나의 언어, 아직 말해지지 않은 감각의 기호다.”
–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
푸른 드레스. 속옷. 겉옷 속, 혹은 피부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부드러운 옷. 속살을 감싸 안으며 겉으로 드러날 수 없는 옷. 속옷은 그러므로 몸이기도 하다. 몸이 된 옷, 속옷. 살짝 비치는 꽃무늬의 얇은 직물이 하늘에 덩그러니 걸려 있다. 감히 드러낼 수 없었던 그 옷은, 이제는 비워진 하얀 공간 안에 수직으로 서 있다.
작가에게 푸른 드레스는 오래된 시간으로부터 온 형상이다. 그의 시선은 드레스의 주름과 해짐, 그리고 바랜 색채에 집중된다. 속옷의 기능에서 발화된 말들은 시간의 주름을 따라 흘러가며, 감정의 결을 따라 강물처럼 흐른다. 그 강에는 사랑과 상실, 그리움과 기억이 실핏줄처럼 얽혀 있다. 작가는 “몸이자 기억”이 드레스에 있다고 말한다. 이는 곧 드레스가 시간의 흔적이며, 기억을 품은 말의 형상임을 뜻한다.
“푸른 드레스는 어머니가 거울 앞에 섰던 순간을, 언니가 감정을 꾹 삼킨 저녁을, 그리고 지금의 나를 함께 품고 있다. 이 옷은 재현된 사물이 아니라 감정의 그릇이고, 기억의 형상이다.”
작가의 이 말은 드레스가 단지 시간의 조각이 아닌, 세대와 감정, 그리고 몸의 기억을 입은 깊은 감각적 실체임을 보여준다. 이 드레스는 단순한 의복이 아니다. 그것은 피부에 닿은 가장 섬세한 감각이며, 동시에 그 몸이 지나온 시간과 기억의 겹을 간직한 옷이다. 속옷은 보이지 않지만, 가장 진실하게 몸을 감싸며 존재를 증명한다. 하늘에 걸린 드레스는 주체로부터 이탈한 채 떠 있는 기억이며, 존재의 껍질이자 잔여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형상이 아니다. 드레스의 주름은 말의 주름이며, 감정의 흐름이자 흔들리는 언어다.
이제 드레스는 더 이상 여성의 몸을 감추는 의복이 아니라, 그녀의 시간을 입은 말의 옷이 된다. 숨기고 싶었던 몸이 그리운 몸으로 남을 때, 그 몸은 드레스의 흔들림으로 다시 떠오른다. 보이지 않지만 가장 진하게 존재하는 것—그것은 ‘그녀(She)’의 이름 없는 기억이며, 지금 이 공간을 은밀히 채우고 있다.
투명하고 얇은 직물로 된 여성의 속옷 드레스는 감춰졌던 말, 말해질 수 없었던 기억을 조용히 발화하는 장치가 된다. 두 벌의 드레스는 서로 마주 서 있고, 때로는 여러 벌의 드레스들이 서로를 향해 시선을 주고받는다. 몸은 사라졌지만, 옷은 여전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옷은 더 이상 외부의 시선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내면의 시간과 침묵의 언어가 서려 있는 주체적 상징으로 자리한다.
작가는 이 드레스를 통해 여성이 말할 수 없었던 시간, 감춰져야 했던 몸, 드러낼 수 없었던 주체를 조형의 언어로 발화한다. ‘She’는 단지 한 명의 여성이 아니라, 이름 없는 수많은 ‘그녀들’의 이야기이며, 역사와 사회 속에서 침묵해 온 여성성의 복원이다. 이때 드레스는 일종의 ‘되기(becoming)’의 상태에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것처럼, 이는 고정된 젠더나 규범적 정체성이 아니라, 감각과 언어 사이를 끊임없이 흔들며 이동하는 존재이다. 여성은 더 이상 타자의 시선 속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를 발화하는 살아 있는 몸이 된다.
드레스는 말이 되고, 몸은 언어가 되며, 그림은 증언이 된다. 알로카시아가 빛으로 자라난 생명의 언어였다면, ‘She’는 사라진 몸들이 남긴 언어의 잔향이다. 두 작업은 서로 다른 사유를 품고 있지만, 존재의 침묵을 감각의 장면으로 옮겨낸다는 점에서 깊은 연결을 가진다. 알로카시아는 시간과 빛의 순환 속에 서 있는 존재의 흔적이고, 'She'는 기억과 감정의 흐름 속에서 발화하는 몸의 목소리다. 두 작업 모두, 사라진 것들과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 사이에서, 지금 이곳을 은밀히 흔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3.
꽃 – 결과 겹, 그리고 시간의 층
겹겹을 이룬 푸른 획. 푸름과 푸름이 만나 하나의 공간을 만든다. 만들어진 푸른 공간. 그 공간을 이루는 하나는 바로 ‘획’이다. 커다란 붓이 지나간 자리, 붓의 운동이 남긴 푸른 흔적. 이 푸른 획들이 모여 공간을 이룬다. 그 공간은 깊은 심연이면서도 동시에 투명한 결로 구성된 장소다. 획은 단순한 붓의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손의 운동과 시간의 흐름이 동시에 각인된 감각적 기록이며, 화면 위에 펼쳐진 최초의 시간적 흔적이다.
꽃은 바로 이 푸른 공간 위에서 피어난다. 결들이 쌓여 이룬 겹의 층위. 식물의 잎이자 시간의 주름 같은 이 푸른 바탕 위에, 흰 꽃들이 무리를 이루며 조용히 발화한다. 하얗게 피어난 꽃들은 그것은 식물의 형상만이 아니며, 시간과 시간의 겹, 그리고 그 위를 흐르는 감정의 흔적이다. 이 겹은 단선적인 시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순간들이 포개지고 스며든 층위로서의 시간이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이 화면 위에서 시간은 쌓이고 주름지며, 서로 겹쳐지는 존재의 깊이를 형성한다.
이 회화 연작은 식물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결을 이루는 손의 흐름, 겹을 만들어내는 시간의 흔적, 그리고 꽃이라는 감각의 언어를 통해 조형된 감성의 응축된 장소다. 화면은 붓질의 시간, 색의 침윤, 물감의 농담을 따라 구성되고, 그 안에 놓인 꽃은 단지 식물학적 대상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 존재와 무의식이 교차하는 하나의 흔적으로 자리한다.
푸른 획은 수평만이 아니라 수직의 결도 가진다. 수평과 수직의 교차. 획과 획들의 겹. 그것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이 내려앉은 자리다. 그리고 그 위에 꽃은 피어난다. 피어남은 설명되거나 언어화되지 않는다. 피어남은 언어를 초월하여, 감각과 몸짓으로 남는다. 흰 꽃들은 말없이 발화되며, 공기 속에서 흩날리는 존재의 순간들로 남는다.
김혜성 작가의 ‘꽃’은 존재의 층위가 시간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식물의 몸과 붓질의 결을 통해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화면 위에 겹겹이 쌓인 시간, 그 시간 위에 놓인 꽃은 단지 조형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의 흔적이자 시간의 무늬다. 이 꽃들은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겹쳐지는 시간의 몸짓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 피어남은 결코 끝나지 않는 시간의 몸짓처럼, 우리 앞에 조용히 서 있다.
4.
피에로 – 가면의 생명, 웃음의 뿌리
‘피에로’는 김혜성 작가의 이번 작업 시리즈 가운데 가장 복합적인 형상이다.
붉은 코, 붉은 입술, 웃고 있는 눈. 형광색 고수머리 가발을 쓴 피에로의 얼굴은 소금꽃처럼 흩날리는 빛의 결 위에 스며든다. 그 밝음은 변주곡처럼 경쾌하게 화면 전체로 퍼져나가며, 어느새 조용히 스며들고 사라진다. 음악처럼 흐르다가, 몸짓처럼 멈춘다.
그러나 피에로의 웃음은 진정한 표정이 아니다. 그것은 가면의 근육이다. 웃고 있는 얼굴 아래에는 오래된 슬픔이 응고되어 있다. 하얀 무대 위, 피에로는 홀로 선다. 이 무대를 구성하는 것은 화면 바탕에 촘촘히 붙여진 쌀이다. 쌀은 빛을 품은 씨앗이며, 아직 발아하지 않은 생명의 기호다. 이 환한 백색의 바탕 위에 피에로가 놓인다. 바람도, 음악도 멈춘 적막의 중심에서, 광대의 얼굴은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적막이 깨어지는 순간, 속삭이듯, 무수한 말들이 쌀의 표면에서 피어난다.
피에로는 쌀로 이루어진 무대, 흰 들에 선다. 쌀은 생명과 시간의 결정체이며, 기관 없는 신체, 그리고 지연된 감정의 물성이다. 그는 그 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는다. 웃음이라는 분장을 하고 있지만, 느슨한 멜빵끈은 붙잡지 못한 감정을 상징하고, 분장된 얼굴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쓰고 살아가는 수많은 가면의 흔적을 떠올리게 한다.
피에로는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꾸며진 웃음과 그려진 입술 사이를 지나며, 진실은 언제나 가면 뒤에 숨는다. 그는 자기 자신을 직접 발화하지 못하는 자이며, 그러나 바로 그 가면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발화된다. 삶을 견디기 위해 웃음을 선택했지만, 그 웃음은 단순한 은폐가 아니라 존재를 생성하는 또 다른 사건이다. 현실이라는 무대를 살아가는 지금, 피에로의 분장 없이 살아가는 이가 과연 있을까. 어느 순간, 어느 공간에서든 우리는 가면을 쓴 자신과 마주한다.
작가의 피에로는 무대 위의 인물이자, 동시에 그 무대를 응시하는 관객이기도 하다. 슬픔과 웃음, 감춤과 드러냄, 씨앗과 가면—이 이중적인 조형 속에서, 작가는 지금-여기의 생의 형식을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드러낸다. 머물러 있는 감정, 곧 시작될 생명, 그리고 아직 피어나지 않은 말의 흔적이, 피에로의 형상을 통해 회화적으로 표출된다.
쌀은 아직 발화되지 않은 감정과 시간의 씨앗이다. 피에로는 그 위에 서서, 말해지지 않은 생명의 가능성을 조용히 응시한다. 쌀의 표면은 시간이 머물러 있는 장소이며, 그 위에 선 피에로는 발화와 침묵 사이에서 흔들린다.
5.
시선의 교차, 존재의 발화 –Planet-Alocasia, She, 꽃, Pierrot
별–알로카시아(Planet–Alocasia), 그녀(She), 꽃, 피에로(Pierrot). 이 네 개의 형상은 하나의 공간 안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옷은 알로카시아를, 알로카시아는 꽃을, 꽃은 피에로를, 피에로는 다시 옷을 응시한다. 그 시선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원을 그리듯 순환하거나, 불규칙하게 분절되며, 서로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 시선은 감각의 지층 위에서 겹쳐지고, 관계적 의미를 생성해 나간다.
이 시선은 단선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그들은 서로를 응시하면서, 침묵 속에서 말을 건네고, 형상 없이도 의미를 발화한다. 그 응시는 곧 의미의 중첩이자, 감정의 밀도를 구성하는 발화의 층위가 된다.
‘그녀(She)’는 기억을 입은 몸이다. 감춰진 시간과 감정의 주름을 외부로 드러내는 감각적 피부이며, 의복은 단순한 덧입기가 아니라, 과거의 감각과 경험을 간직한 시간의 층이다.
‘별–알로카시아(Planet–Alocasia)’는 시간과 빛, 그림자가 교차하는 생명의 소우주다. 알로카시아의 줄기와 잎은 공간을 가르며 생명의 선을 그리고, 존재의 결을 형성한다. 식물적 시간성과 감각의 순환을 품고 있는 형상이다.
‘꽃’은 순간적으로 발화되는 감정의 언어이자, 기억과 존재의 흔적이 응결된 층위다. 꽃은 찰나성과 영원성이 맞닿는 결의 표면에 피어오르며, 감각과 시간을 응축한 존재의 증언이 된다.
‘피에로(Pierrot)’는 웃음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눈물과 슬픔의 형상이다. 그는 과잉된 감정의 외화 속에서 침묵을 노래하며, 웃음을 가장한 울음을 흘리는 존재다. 가면을 통해 자기 자신을 숨기면서 동시에 생성하는 존재론적 흔들림을 보여준다.
이 네 존재는 서로에게 말을 건넨다. 발화는 형상 없이도 이루어지고, 의미는 침묵 속에서도 생성된다. 침묵 속에서도 응시는 지속된다. 그리고 이 복잡한 시선과 발화의 교차점, 그 혼재된 관계 항들의 중심에 관객이 위치한다.
관객은 이들 사이를 이동하며, 자신이 투영된 하나의 거울 조각을 마주하게 된다. 그 거울은 알로카시아일 수도, 피에로일 수도, 꽃잎 아래 숨겨진 기억이거나, 드레스의 주름 속에 잠든 말일 수도 있다. 이 거울은 투영이자 반영이며, 타자 속에서 발견되는 자기 자신의 형상이다.
작가의 작업은 단순한 이미지의 병치가 아니다. 그것은 의미의 충돌과 교차, 시선과 시선의 대면, 존재와 존재의 흔적이 서로를 반사시키며 빚어내는 감각의 장이다. 관객은 이 장(場) 안에서 ‘그들’과 ‘자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교차점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다. 교차는 기존 존재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존재적 감각을 생성하는 사건이다. 시선과 발화가 중첩되는 이 지점에서, 존재는 단순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이(transition)하며, 스스로를 다시 구성해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발화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김혜성의 네 형상은 동등한 무게로, 하나의 평면 위에서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옷’은 오래되어 바래지는 시간의 주름이고, ‘꽃’은 새로 피어나는 감각이며, ‘알로카시아’는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생명의 소우주이고, ‘피에로’는 지금을 살아가는 감정의 가면이다. 이들은 서로 교차하며, 4방의 축을 이룬다.
이 네 축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각 독립적인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지평 위에 놓인 사유의 구조로 작동한다. 그들의 말은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고, 원형의 장 안에서 끊임없이 교차하며, 관객의 감각 안에서 다시 발화된다.
바로 그 교차점—시선과 말, 존재와 존재가 마주치는 지금의 지평—이야말로, 김혜성의 회화가 열어놓는 동시적 감각의 장소이다.
6.
결 – 현대미술의 시선에서 본 의의: 감각의 언어, 존재의 발화
김혜성의 작업은 단순한 감각의 시각화를 넘어서, 회화가 ‘말 없는 몸의 언어’로 작동할 수 있는 지점을 탐색하는 조형적 실천이다. 그는 조형의 기본 요소들을 통해 언어 이전의 감각과 기억을 끌어올리고, 회화를 시적(詩的) 언어로 전환한다. 이 언어는 침묵 속의 울림이며, 몸의 흔적이 남긴 발화의 리듬이다. 특히 그의 작업은 ‘감각의 발화’라는 핵심적인 사유를 관통한다. 이는 언어 이전, 혹은 언어 바깥에서 감각과 존재가 발화하는 장면을 포착하려는 시적 조형적 실천이다.
‘별–알로카시아(Planet–Alocasia)’는 생명과 시간의 식물학에서 출발해, 빛과 그림자, 쌀이라는 물성을 통해 존재의 조건을 재구성한다. ‘She’는 몸의 결과 주름, 드레스의 직물과 여백을 통해 감춰졌던 여성성의 기억을 되살리며, 시공간의 침묵을 언어화한다. ‘꽃’은 푸른 획과 결의 겹 위에 피어난 감각의 발화이며, ‘피에로’는 웃음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실존의 주름을 드러내는 복합적 존재의 형상이다.
이 회화는 들뢰즈의 ‘되기(becoming)’나 ‘기관 없는 신체(body without organs)’, 루스 이리가레이의 ‘불가능한 말하기(parler-impossible)’―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침묵과 언어 사이의 긴장 위에서 발화되는 여성적 언어―와 동양 회화의 여백 개념이 교차되며, 회화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보이게 하며, 번역해 내는 매체임을 드러낸다.
김혜성의 회화는 이러한 사유를 통해 단지 서구 현대미학과 접속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엄의 시선과도 만난다. 그의 작품 속 형상들은 각각 독립적인 구조를 지니면서도 서로를 감싸 안고, 끊임없이 스며들며 교차한다. 이는 화엄(華嚴)의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인드라망(Indra’s Net)의 세계’를 연상시키며, 존재와 존재 사이의 분리를 넘어서려는 감각적 윤리를 시각화한다. 그의 회화는 그 자체로 감각의 인드라망이며, 하나의 형상이 모든 것을 내포하고, 모든 것이 하나로부터 발화되는 화엄적 조형 언어의 실천이다.
또한 김혜성의 작업은 바디아트의 신체성과 설치미술의 공간성을 감각적으로 수용하여, 평면을 넘은 회화의 확장 가능성을 제안한다. 화면에 붙여진 쌀의 물질성과 그 위에 얹힌 형상들은, 몸의 흔적과 시간의 층위를 공간 안에서 발화시키는 설치적 감각으로 변모한다. 화면은 단지 이미지의 재현을 넘어서, 기억과 감정, 감각의 움직임이 교차하는 생성의 장으로 전환된다.
김혜성의 회화는 자연의 표면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회화 자체를 기억의 저장소이자 감각의 재구성의 장으로 전환시킨다. 옷과 그림자, 꽃과 식물, 피에로와 쌀의 형상은 보이지 않던 감정의 구조와 발화되지 않던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하며, 동시대 미술 안에서 존재와 감각, 기억과 주체를 바라보는 방식의 조형적 전환을 선언하고 있다.
그녀의 화면은 말해질 수 없었던 세계의 피부이며, 침묵을 감각으로 번역한 하나의 발화이다.
2025. 4.
이 호 영 (미술학 박사, 작가)
작가노트
별-알로카시아
나는 일상 속 가장 익숙한 재료인 쌀 위에 알로카시아를 그려 넣으며, 자연과 생명의 조화를 시각적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쌀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지만 그 존재의 깊이에 대해 쉽게 잊는 재료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자 시간의 축적이며, 우리 삶의 바탕이다. 나는 이러한 쌀의 물성을 그대로 화면으로 옮기고, 그 위에 식물이라는 또 다른 생명체를 더해 보았다.
알로카시아는 뚜렷한 잎맥과 넓은 잎을 가진 식물로, 마치 자연이 만든 조형물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식물의 강인하면서도 유려한 형태에서 생명력과 동시에 감성을 읽는다. 작품 속 알로카시아는 명확한 선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스며들고, 번지고, 잔잔하게 퍼지는 색감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기억 속의 잔상처럼, 혹은 마음속 풍경처럼 다가온다.
여기에 나는 한지를 염색하여 포인트로 덧붙였다. 한지는 우리 고유의 숨결을 담고 있는 종이이자, 자연의 섬유로 빚어진 감각적 매체다. 염색된 한지 조각들은 마치 잎 위에 떨어진 빛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기척처럼 화면 곳곳에 놓이며, 감정의 리듬을 만든다. 그것은 시각적인 장식이 아니라, 감성의 흔적이다.
이 작업은 재료와 형상, 시간과 감각 사이의 대화를 담고 있다. 쌀이라는 다소 무거운 생명의 기반 위에, 알로카시아의 부드럽고 흐르는 형상, 그리고 한지의 가볍고 투명한 감성이 겹쳐지며, 생명과 감정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간다.
She: 푸른 옷에 대한 단상
나는 오래된 드레스를 마주할 때마다 어떤 감정의 흔적들을 발견하곤 한다.
해어진 옷감의 결, 바랜 색채, 미세한 주름과 자국들은 마치 시간의 기록처럼 느껴진다. 이 드레스는 단순히 입는 옷이 아니다. 그것은 지나온 시간, 말을 건네지 못한 마음, 사랑과 상실의 무게를 품은 하나의 ‘몸’이자 ‘기억’이다.
낡은 드레스는 어머니가 거울 앞에 섰던 순간을, 언니가 문득 감정을 꾹 삼킨 저녁을, 그리고 지금의 나를 함께 품고 있다. 이 옷은 재현된 사물이 아니라 감정의 그릇이고, 기억의 형상이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세대를 관통하는 여성의 정체성과 내면의 풍경을 조용히 비추고 싶었다.
그리움과 생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한 벌의 드레스처럼.
삐에로
삐에로의 웃음 속에는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다. 어쩌면 무대 뒤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는 자화상일 수도 있고, 사회 속에서의 역할과 내면의 괴리를 탐구한 작업이기도 하다.삐에로 시리즈는 그러한 감정의 복합성과 모순을 담아낸다. 작품 속에서 삐에로는 슬픔을 밝게 꽃처럼 피워내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꽃
이 연작은 흰 풀꽃을 중심으로 한 사유의 기록이다. 작고 여린 흰 꽃들은 오랜 시간 자연 속에서 조용히 피고 지며, 존재의 미세한 떨림과 생명의 끈질긴 지속성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 꽃들을 통해 말 없는 것들의 언어, 존재하지만 종종 보이지 않는 것들의 이야기를 하고싶다.
작가약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
2023 ‘Mirrors-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You&I,대안공간 설악)
2023 ‘섬-Installation art(설악의 봄,대안공간NHA, 속초)
2023 ‘거울-김혜성 초대전’(플러스나인 갤러리,인사동)
2022 ’거울-섬‘ (학고재 아트센터, 삼청동)
2025 ‘식물원전’(샘 미술관, 서울)
2024 ‘My War'(샘 미술관, 서울)
2024’ 인간전‘(FaceA갤러리, LA)
2023‘ 인간전’(두나무갤러리, 안양)
2022’ H4전‘(바움아트스페이스, 서울)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