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안내
UPCOMING_Boiling Point 90°C
Hakgojae Artcenter
2026. 6. 18 - 7. 4
성광 | 재 진 | 수 린
Boiling Point 90°C
물이 끓기 직전의 표면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하다. 냄비 안쪽에서는 이미 수많은 입자들이 서로 부딪히고, 바닥 가까운 곳에서는 작은 기포들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표면은 아직 완전히 뒤집히지 않는다. 100°C가 되기 전의 물은 조용해 보이지만, 그 조용함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변화가 시작되었으나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시간, 내부의 운동이 바깥의 형태를 바꾸기 직전의 긴장이다.
《Boiling Point 90°C》는 바로 그 임계의 순간에 머문다. 완전히 끓어오른 뒤의 격렬함이 아니라, 표면 아래 응축되어 온 열이자, 변화를 예감하게 하는 태동의 상태다. 끓는점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랜 시간 내적 긴장과 압력을 견뎌온 축적된 열의 결과다. 본 전시는 어느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기보다 여러 방향으로 흔들리는 순간의 일렁임을 붙잡는다.
《Boiling Point 90°C》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경계의 자리다. 어떤 것이 아직 하나의 이름으로 정리되지 않았을 때, 그것은 기존의 질서 안에서 불안정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 라스는 모든 분류 체계가 언제나 그 질서 안에 온전히 들어맞지 않는 ‘예외’를 낳는다고 보았다. 어느 한쪽으로 안정적으로 귀속되지 않는 이 예외적인 존재들이 나타날 때, 기존의 체계는 거대한 긴장과 함께 새로운 감각을 발생시킨다.
성광, 재진, 수린의 작업은 모두 이러한 예외의 자리에서 출발한다. 성광의 인물은 인간과 동물, 이성과 충동, 억압과 해방 사이에 놓인다. 재진의 이미지는 과거의 공방과 현재의 브랜드, 장인의 노동과 소비사회의 욕망 사이에서 작동한다. 수린의 조각은 전통적 믿음과 디지털 제작, 사적인 기원과 공적인 표면 사이에서 발현된다. 이들은 어느 한쪽으로 명쾌하게 분류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질서가 맞부딪히는 경계면에서 동시대의 열을 발생시킨다. 억눌린 감정은 괴물의 신체로 밀려 나오고, 소비사회의 이미지는 오래된 공방의 노동 장면 속에서 다시 달궈지며, 디지털로 출력된 조각은 누군가의 마음이 닿는 순간 작은 토템이 된다. 어느 한쪽으로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기에 이 작업들은 계속해서 끓는다.
성광(1999-)의 화면에서 열기는 사회적 구조의 압박을 뚫고 나오는 신체와 광기(狂氣)로 터져 나온다. 정면성의 인물 구성과 불안정한 신체 표현은 심리적 긴장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억눌린 감정들이 임계점에 다다를 때 ‘몬스터’라는 파괴적이면서도 해방적인 페르소나로 형상화된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허물어진 이 괴물은 사회적 질서와 충돌하며 내면에 축적된 에너지가 표면으로 밀려 나오는 필연적 과정의 은유다. 규범적 침묵에 균열을 내기 위해 야만성과 강인함의 외피를 입은 인물들은 모자와 그래픽 티셔츠, 변형된 브랜드 로고를 걸치고 오늘의 도시 위에 서 있다. 자신을 드러내고 더 단단해 보이기 위해 기호를 두르는 현대인의 초상과 겹쳐지는 이 장치들은 본질을 은폐하는 동시에 사회적 존재감을 역설적으로 증폭시키는 현대 문화의 메커니즘을 투영한다. 날카로운 이빨, 혓바닥을 한껏 드러낸 입은 오랜 침묵을 깨고 내면의 에너지를 배설하며 아직 온전히 속하지 못한 세상을 향해 소리와 노랫말을 내지른다. 주어진 화면을 넘지 않으면서도 정지된 형태를 사정없이 무너뜨리는 압도적인 에너지, 감정이 폭발하기 직전 이미 눈과 입, 손끝에서 격렬하게 끓어오르고 있는 몸의 온도가 성광의 90°C 다.
재진(1990-)의 작업에서 발생하는 열은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부딪히며 생기는 정교한 마찰열이다.
작가는 요스트 암만의 16세기 목판화 『직업의 책』 속 공방 풍경을 무대로 삼는다. 그동안 한정판 스니커즈나 리셀 문화 등 현대 소비사회의 지배적인 기호들을 과감하게 밀어 넣었다면, 이번 작업에서는 단순한 브랜드를 넘어 동시대의 ‘아트 컬처(Art Culture)’로 시선을 확장한다. 특히 이제는 상업적 상품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문화로서 작동하는 애니메이션 포켓몬 캐릭터를 화면 속에 새롭게 등장시킨다. 장인들이 지키던 숭고한 공간 내부에서 대장장이가 문화적 상징성을 부여받은 대상을 쇠처럼 달구어 망치질하는 모순적인 결합은 익숙했던 소비재의 도상을 노동과 욕망의 가치를 환기하는 새로운 상징으로 뒤바꾼다. 그의 화면은 가볍고 유희적인 첫인상 아래 과거에 대한 향수와 현재에 대한 비판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미지가 어느 하나의 명쾌한 온도로 굳어지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충돌하며 가치를 질문하는 것, 그것이 재진의 90°C 다.
수린(1998-)의 작업에서 온도는 조용하게 쌓인다. 3D 프린팅 기술로 매끄럽게 출력한 꽃과 곤충, 석탑 형식의 조각들을 차가운 스테인리스 현판과 거울 위에 결합한다. 특별한 영적 힘은 대상 자체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믿는 마음에서 생겨난다는 '시심작불(是心作佛)'은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축이다. 디지털 모델링과 레진 프린팅이라는 첨단 기술로 복제된 사물일지 라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과 기원이 닿는 순간 그것은 개인적 토템이 된다. 특히 필라멘트를 한층씩 쌓아 올리는 FDM 프린팅 공정은 돌을 하나씩 정성스레 쌓아 올리며 탑을 세우던 전통적인 기원의 시간성을 고스란히 닮아 있다. 차가운 금속 현판이라는 공적인 형식 위에 사적인 바람의 형상들이 얹히고, 거울 표면을 통해 관람자의 얼굴이 작품 안의 도상들과 중첩될 때, 믿음은 추상 적인 개념을 넘어 감각적인 울림으로 환원된다. 수린의 90°C는 조용히 쌓이고 머무르며 어느 순간 사물을 특별한 존재로 바꾸는 따스한 열기다.
《Boiling Point 90°C》는 완결된 해답으로서의 100°C를 거부한다. 대신 모든 에너지가 거칠게 응축된 가장 숨 가쁜 온도인 90°C의 일렁임을 전시장 내부로 불러들인다. 물이 끓기 직전, 내부의 에너지가 최고조에 달해 가장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이다. 이 상태 안에서 성광은 억눌린 감정이 괴물의 신체로 가시화되는 순간을, 재진은 소비사회의 이미지가 단단한 신화가 되는 여정을, 수린의 조각은 디지털 사물이 사적인 믿음의 매개로 변하는 시간을 보여준다. 세 작가의 작업은 모두 동시대의 표면에 겹겹이 쌓인 압력과 욕망을 지나, 마침내 그것들이 다른 형태의 온기로 전환되는 순간을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