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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COMING_이차옥 | Memories
Hakgojae Artcenter 1F
2026. 10. 20 - 10. 31
사라진 것들과의 감응 — 이차옥의 《Memories》
이차옥은 개인전 《Memories》에서 사진의 전통적 어법을 넘어, 변화하는 동시대 매체 환경에서 이미지가 어떻게 생성, 감각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새하얀 설경(雪景), 흐릿해진 목련 그리고 다채롭게 변주된 색채의 이미지들은 표면적으로 서로 다른 조형적 실험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해 온 기억, 흔적, 이미지의 존재 방식에 관한 일관된 사유가 자리한다.
작가는 초기 작업부터 전통 공간, 식물, 자연 등의 대상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시점의 변화와 근접한 시각을 실험해 왔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보편적 인식 체계를 의심하고, 하나의 대상에 고정되어 있던 의미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다시 말해 그에게 사진은 재현의 도구인 동시에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재고할 수 있는 장치다. 특히 이전 발표작 가운데 ‘구포교-김대욱, 2014’. ‘이화여대-이경희, 2014’는 과거 자신의 삶을 기념했던 사진 속 장소를 다시 방문하여 현재의 시점에서 촬영한 이미지를 하나의 화면 안에 병치한다. 과거의 사진과 현재의 이미지는 같은 장소를 지시하지만 더 이상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지 않는다. 두 이미지 사이에 시간의 간극과 기억의 불완전성이 개입한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순간을 붙잡고 있는 사진과 그것을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작가의 반응이 교차하며 미묘한 불협화음을 발생시킨다. 이때 디지털 조합은 편리한 조작 기술이 아니라, 기억이 과거를 보존하는 동시에 변형한다는 사실을 시각화하는 장치로 쓰인다.
2020년 이후 진행된 ‘Fading Away’와 ‘Empty Flowers’에서 이러한 실험성이 더욱 급진적인 형태로 전개된다. 외형적으로 20세기 중후반 서구의 색면추상회화를 연상시키는 이 이미지들은 디지털 후보정 과정을 거쳐 원래의 사진적 지시 대상이 거의 식별되지 않을 정도로 변형된 것들이다. 단순화한 형태와 색채, 면과 패턴은 사진이 전통적으로 전제해 온 프레임, 시점, 대상, 지시성의 관계를 해체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미지가 더 이상 사진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다. 반면에 사진적 이미지가 어디까지 변형될 수 있으며, 무엇이 여전히 사진으로 남아 있는가이다. 따라서 이차옥의 작업에서 사진은 더 이상 대상의 외관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투명한 매개에 머물지 않고 디지털 정보와 이미지, 기억과 감각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이미지들은 완전히 비물질적이지 않다. 아무리 대상과의 물리적 인과성이 약화하고 원래의 형상이 해체되었더라도, 최종적으로 그것은 디지털 정보가 프린터의 안료를 거쳐 물질적 지지체 위에 남긴 자국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흔적’은 이차옥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미학적, 개념적 요소로 부상한다. 흔적은 존재했던 것의 잔여이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의 현존이다. 그것은 과거를 그대로 복원하지 않지만, 부재한 것을 현재의 감각 속에 호출한다. 흑과 백의 대비가 두드러지는 설경 이미지와 디지털 조작을 통해 생성된 꽃의 이미지 역시 서로 다른 제작 방식에도 불구하고 흔적의 논리 안에서 만난다. 전자는 세계에 존재했던 장면의 광학적 흔적에 가까운 반면, 후자는 디지털 변형을 통해 원래의 대상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든 것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이미지가 존재했었던 것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Empty Flowers’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꽃은 재현의 대상에 그치지 않고, 물질과 이미지, 기억과 감각의 관계를 탐구하기 위한 하나의 출발점으로 위치한다. 그의 작업에서 꽃은 여러 단계의 소멸을 거친다. 첫 번째 소멸은 물질적 소멸이다. 실제로 존재했던 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피고 시들며 마침내 사라진다. 그러나 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기억 속으로 이동한다. 두 번째 소멸은 재현으로서의 꽃에서 발생한다. 사진은 꽃을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하고 보존하지만, 사진 속 꽃은 이미 살아 있는 꽃이 아니라 그것의 시각적 흔적이다. 세 번째 소멸은 디지털 변형을 통해 발생한다. 꽃의 형태와 색채, 윤곽과 구조가 해체되고 이미지의 정보는 새로운 색과 면, 패턴과 흔적으로 재구성된다. 마침내 관객은 그것이 한때 꽃이었다는 사실조차 쉽게 인식하기 어려운 지점에 도달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하나의 역설적인 질문이 발생한다. 꽃이 사라졌다면 무엇이 남는가?. 이 물음은 플라톤적 의미에서 본질이나 이상적 이데아를 소환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과 형상, 재현과 해석 사이의 관계가 해체된 이후 어떠한 감각적 가능성이 발생하는지를 묻는다. 꽃은 형상을 잃음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즉, 소멸은 부재의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의 조건이 된다.
어딘가에서 보았을 꽃은 분명 실재했지만 이제 그것은 작가의 기억과 상상 속에서만 호출된다. 그리고 기억은 대상을 온전히 보존하는 저장소로 기능하지 않는다. 기억은 지나간 것을 선택하여 현재의 지각 속에서 다시 구성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차옥이 사용하는 디지털 기법은 기억의 작동 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미지는 과거의 대상을 그대로 복원하는 대신 그것을 변형하고 분해하여 재조합한다. 여러 제작 과정을 거쳐 꽃은 더 이상 꽃의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객체로 물질화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꽃, 이미지, 기억, 관객 사이에서 새로운 현상이 어떻게 발생하는가이다. 색, 면, 흔적은 관객의 지각과 만나면서 고정된 의미에서 벗어나고, 이미지와 관객은 하나의 감응적 관계망 안에서 서로를 변화시킨다. 꽃의 변형은 단순한 형(形)의 소멸이기보다, 서로 다른 요소들과 섞이면서 새로운 감각을 생성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차옥의 작업은 베르그손(Henri Bergson)의 기억과 지속에 관한 사유와 생산적인 접점을 형성한다. 베르그손에게 과거는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지각 속에서 지속적으로 작동한다. 기억은 현재의 지각과 관계하면서 끊임없이 새롭게 현실화하는 힘이다. 이차옥의 추상적 이미지 역시 꽃의 기억을 현재의 감각 속에서 다시 작동하도록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흔적’은 단순히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생성의 계기가 된다.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미지가 발생하고, 이미지가 다시 해체되었기에 새로운 감각이 발생하는 것이다. 물질적 소멸은 비물질적 기억으로 이행하고, 기억은 다시 새로운 이미지와 물질로 돌아온다. 꽃은 형태를 잃는 대신 감응으로 지속된다. 따라서 ‘Empty Flowers’에서 꽃은 기억의 대상인 동시에 기억 그 자체이며, 사라짐과 생성이 순환하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이처럼 작가는 사진의 지시성과 재현성에 관한 기존의 논의를 넘어, 이미지가 무엇을 재현하는가에서 이미지가 무엇을 발생시키는가로 질문의 방향을 전환한다. 사진은 더 이상 대상과 이미지 사이의 일대일 대응을 보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관계의 균열과 불확실성 속에서 새로운 감각적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디지털 기술 역시 기억과 지각,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경계를 재구성하는 창작의 방법론으로 기능한다.
이차옥의 사진 세계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세계를 세심하게 바라보는 ‘눈’이다. 그의 바라봄은 대상을 분석적으로 조망하던 근대적 관찰자의 시선과 다르다. 작가는 현상을 고정된 대상으로 붙잡기보다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고 변화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그의 시선에서 주체와 객체, 인간과 비인간,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경계 역시 점차 느슨해진다.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이는 것이 서로를 구성하는 관계 속에서, 감각은 특정한 주체에게 귀속된 경험을 넘어 발생하는 사건과 같다. 이 지점에서 그의 작업은 무아(無我)의 감각과도 조응한다. 무아란 존재를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로 파악하는 관념에서 벗어나 연기(緣起)에서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익숙한 사물과 풍경의 경계가 흐려지고 서로 얽히는 것은 이미지, 관객, 세계 사이의 구조를 재배치하는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차옥의 《Memories》는 기억에 관한 서술을 통한 이미지의 존재론적 사유와 그 이후에 발생하는 감응에 관한 모색이다. 작가는 꽃과 풍경으로 과거를 보존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미지가 기억을 붙잡으려는 순간 그것이 어떻게 사라지고 다시 생성되는지를 보여준다. 그에게 사라짐은 망각의 끝이 아니라 생성의 시작이다. 흔적은 새로운 감각이 열리는 자리이며, 기억은 현재 속에서 과거를 다시 발생하는 동력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최초의 물음으로 돌아간다. 꽃이 사라진 후 무엇이 남는가?. 아마도 세월 속에 흐려지고, 재현 과정에서 되살아나 관객과 호흡하게 될 한 사람의 감각일 것이다. 우리 앞에 작가가 불러낸 어느 봄날의 집 마당, 향기로운 꽃 내음으로 가득했을 바로 그 순간이다.
-박형근(사진가, 예술학 박사)
작가노트
어린시절 마당에 피어 있던 꽃들을 지금까지도 내 기억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꽃들은 지나간 시간과 그리움, 그리고 마음속 깊이 간직해온 기억들이다.
현역의 삶을 내려 놓은 늦은 나이에 우연히 사진을 만나고, 사진은 뗄 수 없는 친구가 되었다. 쉽게 시작한 사진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예술의 영역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흥미를 갖게 해 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고 있는 디지털문화의 시대에 막간의 지식으로 사진과 접목하고 응용해 본다. 사진의 재현만이 아니라 피사체를 해체하고 형태가 그후 만들어 낸 잔상으로 감각의 흔적을 재구성한다. 언젠가부터 몰입하게 된 꽃의 피사체를 현실에 존재하는 꽃에서 벗어나 또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나는 꽃을 찍지 않았다. 나는 꽃을 상상했다.
강렬한 색으로 변화된 꽃의 이미지가 내 안의 기억과 생명에 대한 감정을 드러낸다면 눈으로 덮인 자연은 그와는 다른 고요함을 보여준다. 화려한 꽃과 고요한 눈은 서로 다른 세계처럼 보이지만 나에게는 모두 자연을 바라보며 발견한 시간의 흔적이다. 하나는 색으로 확장되고, 하나는 여백과 침묵으로 사라져 간다.
사진은 나에게 스트레스이며 긴장감이고 존재감을 빛나게 해주는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