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안내
별빛은 신화다01 크기 170cmX240cm 천위에 유채 2024
별빛은 신화다029 170cmX130cm 천위에 유채 2025
별빛은 신화다030 170cmX130cm천위에 유채 2025
새가 날아오르는 시간001 크기 170cmX240cm 천위에 유채 2024
새가날아오르는 시간021크기84.1cmX118.9cm 종이위에 혼합재료2024
새가날아오르는시간 055 크기84.1cmX118.9cm 종이위에 혼합재료2024
짜라투스트라의 동굴식탁001 크기 170cmX240cm 천위에 유채 2025
짜라투스트라의 동굴식탁026 170cmX130cm 천위에 유채 2024
새가 날아오르는 시간 | 우은정
별빛은 신화다






Hakgojae Art Center  

B1F

2025.12.9-12.30

 





우은정 작가론 
걷는 인간(들)



홍예지 미술비평가



1. 밤
나의 길은 나 홀로 걷는 길이다. 걷는 동안 마주치는 세상은 나만 아는 그 세상이다. 등골이 서늘해졌다가, 눈물이 차올랐다가, 마음이 고요해졌다가, 슬며시 미소 짓는 밤들이다. 밤을 걷는 순례자는 감각이 닫혔다 열리는 순간을 사랑한다. 그는 어둠의 목구멍이 집어삼켰다가 도로 뱉어 낸 짐승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제 갈 길을 간다.
긴 긴 밤의 끝, 동이 터 오는 시간. 걷는 리듬으로만 존재했던 우둔한 생명체가 잠에서 깨어난다. 의식의 깊은 잠에서 빠져나온 그는 산 정상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본다. 내려가서 할 일이 무엇인지 그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생에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새롭지 않지만, 그 일에 임하는 그의 마음이 새로워졌다.
그는 먼 길을 돌아 제자리로 왔다. 결국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멀리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떠나 있는 밤 동안 번잡한 마음은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이제, 낮 동안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
그가 밤길을 걸었던 시간은 하룻밤 동안이기도 하고 십 년이기도 하다. 또, 눈을 감았다 뜬 찰나이기도 하다. 순례자의 시간은 신선들이 바둑을 두는 시간, 축지법을 쓰는 자의 시간과 같다. 시간이 끝없이 팽창하고 수축하며 영혼의 밀도가 달라진다. 그 정도에 따라 순례자가 만날 수 있는 세계의 차원이 결정된다. 그리고 그는 그가 본 것을 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2. 낮
낮길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통한다. 그 길은 마을 안 구석구석을 훑으며 광장으로 순례자를 이끈다. 북적이는 광장 한복판에서 그는 지팡이를 들어 보이기도 하고 땅에 내리치기도 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보려고 한다. 짐짓 그렇게 해 본다. 잠깐 돌아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간혹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그를 지켜보는 사람도 있다. 아이들은 (혹은 아이 같은 어른들은) 그의 주위를 뱅뱅 맴돌며 손뼉을 치고 마주보며 깔깔 웃기도 한다. 이 모든 반응을 순례자는 즐기고 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사실 그 또한 구경꾼이고 관찰자이다.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그 자신도 바라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자기 스스로 노출되지 않고서 볼 수는 없는 법이다.
잠시 후 군중 속에 섞여 있던 한 여자가 조용히 걸어 나온다. 그 또한 단출한 옷차림에, 깎은 지 얼마 안 된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다. 여자는 순례자의 주위를 맴돌다 그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선다. 순례자가 몸을 틀어 저쪽을 바라보면 여자도 그쪽을 바라본다. 시선 끝에 무엇이 있는지 살핀다. 여자는 순례자처럼 지팡이를 들어올리지는 않지만, 그가 움직이는 궤적을 비디오를 찍듯이 기억해 둔다. 여자는 자기가 목격한 장면을 다시 재생시키기 위해 글을 쓴다.

3. 교차점
저마다 나의 길을 가던 사람들이 잠시 멈추어 설 때, 지나가는 다른 순례자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할 때, 말로 할 수 없는 무엇이 분명히 전해진다. 그것은 거창한 것은 아니고, 다만 갈 길을 알고 가는 자의 묵묵함이 던지는 위로 같은 것이다. 갈 길이 먼 사람들끼리 시간을 더 지체할 이유는 없다. 만남은 마주침으로 족하다. 이 글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의 중간 지점에서 열린 공동의 쉼터를 가리킨다. 그곳에서 두 명의 걷는 인간이 만났었다. 그들은 절대 고독의 시간을 지나 사람들 속을 헤맸다가 다시 나로 돌아와 밤과 낮 사이의 존재로 살아가는 나날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나를 부수고 세우고 부수면서 가는 ‘길’이란 것이 얼마나 사무치게 아름다운 것인지도. 거듭 ‘화가’의 길을 가기로 결단한 우은정을 청주에서 만났을 때, 자기가 숱한 갈림길에서 몇 번이고 ‘작가’의 길을 가기로 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바보가 여기에 있다. 
짙은 두려움과 의심 속에서도 한결같이 빛나는 샛별을 기억하라고, 그 빛을 따라 계속 걸어가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동굴 속 식탁에 앉아 내게 말했다. 이제 그 동굴에서 걸어 나올 때가 되었다는데, 수십 년 동안 충전된 빛이 곧 이 세상 사람들의 잠긴 눈꺼풀을 두드릴 것이다. 그때 열리게 될 눈들을 상상하며, 짧은 견문록을 마친다. 





 

새가 날아 오르는 時間
         -별빛은 神話다


                              
 하루 왠 종일, 뻐꾸기 소리에 갇혀 걷는 내내 나는 차 두 대를 만난 적도 있고, 밤길을 걷는 어떨 땐, 하늘과 땅이 전부였던 적도 있다. 
 매년 종이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떠난 길들은 심심하기 이를 데 없는 묵 같은 시간이었다. 그 전부는 내게 지루함과 힘듦, 아득함과 아찔함 그리고 생각의 듦과 빠짐의 중간을 허용하는 알량한 아량 외엔 지독하게 하늘 아래 나는 홀로 나도 모르는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도 아닌, 그 아닌 것으로 놓아 지기 일쑤였다.

 길에는 늘 커다란 달이 생각으로 따라다녔다. 밤새의 울음이 환청으로 따라다니고, 부드러운 바람이 온몸을 달콤하게 휘감는가 하면, 흰 것이 보일 듯이 말 듯이 내 의식의 너머에서 나를 가당찮은 지경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그러면 몸서리치도록 소름 돋는 무서움 끝에 간혹 나타난 마을은 어느새 심해 같은 권태에 쌓여 있고, 내가 만나고 춤추고 노래하고 인사할 겨를이 없이 영원으로 달빛에 휩싸여 새하얗게 잠들어 있곤 했다.
 정처가 없이 멀리 걷는다는 것은 참말이지 ‘심심한 가운데에 나를 놓아 보는’ 곤혹스러움 그 자체다. 아무런 재미가 없는 지루함, 끝없이 깨어 있길 요구하는 끝없이 늘어진 반복이 끝없는 길! 잡념! 부애! 맞서야 하는 낯선 두려움! 만약에 길 위의 시간이 삶이라면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가도 또한 그런 연유로 또다시 태어난다면야, 또 길 위에 서고 싶은 거로.

 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이 원이다. 나는 충북 제천 월악산이 보이는 마을에서 태어나 둥그런 달이 이쁜 그곳에서 유년을 보냈다. 내 아버지는 무명화가셨는데, 마루와 안방을 화실로 쓰셨다. 가끔은 붓을 들고 마루 끝에 앉아 멍하게 그린 듯이 바라보시던 그 허공은 필경 인간에 대한 깊은 사유였을 텐데, 그가 바라보고자 했던 세계는 어떤 풍경의 것이었을까? 그가 바라보던 세계를 나는 무엇으로 반복하여 바라보는 것일까?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이 한 물음이든 두 물음이든 뭐든 간에 내가 길 위에서 맞닥뜨렸던 그 사유를 마루 끝에 앉아 그가 멍하게 바라보던 풍경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선과 색깔로 칠할 순 없을까? 그 궁극의 시간을 시시각각 그때마다 보고, 느끼고, 만나고, 사유한 별 씨잘데기 없었던 그 시간을, 이편의 세계와 저편의 세계 중간쯤 어디에서 양 끝을 잡고 ‘깨어 있음’으로 느낀 실존의 이미지쯤으로 표현이 가능해도 될까? 이편의 세계와 저편의 세계를 꼴라쥬로 감정 이입을 하면, 거기에 어딘가 ‘어떤’ 지난 시간으로 되돌려 오늘, 색으로 범벅을 한 지금의 시간으로 꺼내 <참 아름다운 神話의 時間>이라고 다시금 칭할 수 있을까?

                                                   -우은정의 작업일기 中에서

 

 

 

 

 

 

우은정의 프로필



 우은정은 1961년 충북 제천 월악산이 보이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윤정이다. 무명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다. 지금은 수몰이 되었지만 큰 강이 흐르는 마을에서 유년을 복되게 보냈다. 어려서부터 산 너머의 미지가 궁금하여 걸어서 가출을 밥 먹듯이 좋아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에는 충북 전역을 무전으로 걸어 보았고, 특히 십 대 때, 충주댐 수몰 전에 목행부터 영춘 북벽까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본 것이 가장 큰 기쁨 중에 하나다. 이십 대 초반에 삶을 화가로 살 것을 결단하고, 전국을 두루 걸으면서 육십을 넘은 지금, 아직 그 버릇은 남아 있다. 
 고등학교 때는 농사짓는 법을 배웠으며, 대학에서는 회화와 철학을, 대학원에서는 회화와 현대문학을 공부했다. 
 20대 30대 습작기를 지나 본격적으로 작업기에 든 삼십 대 후반 이후부터는 인간의 실존과 존재 방식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했다. 그 주된 의도와 소재는 개인적인 몸의 체험으로 보고 얻어진 감각을 본인의 세계와 재결합시키는 방식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즉 자의적인 해석을 곁들여 인간의 희로애락애오욕의 감정이입을 직접 체험한 풍경과 재조합시키는 형상작업을 하고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인간의 무기력을 다룬 <청동기1992>. 인간의 삶의 태도를 이미지로 다룬 <침묵沈默과 음모陰謀에 관한.1998>. 해학과 풍자의 카툰과 순수 회화의 드로잉의 결합을 시도해서 카로잉CaRowing을 창시한 카툰 실험전<의자의 탄생 설화2001>. <하찮은 것과 하치안은 거 2006년>.<거룩한 편린에 2003년>.<구운몽.2008>. <바람의 결에 바람으로 서서-신선이 사는 마을 2012>.<절대고독에 대한 2015>.<나무 방출 대작전 2019>.<참아름다운 신화의 시간 2022>.<참 아름다운 신화의 시간 2024>. <새가 날아오르는 시간 2024> 등 개인전 20여 회를 했다. 그중 20대 30대 개인전 9회 분량의 작품은 보관 문제로 폐기 되었다.
 평생 화가를 원으로 세워 정진 중이며, 지금은 청주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