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안내
El Concha de Vieira, 2025, Silk, Silk thread, Metallic gold thread, Embroidery, 40x40cm
Firenze Map (Detail), 2025, Silk, Silk thread, Embroidery, 88x86cm
Firenze Map, 2025, Silk, Silk thread, Embroidery, 88x86cm
Hongkong Map, 2025, Silk, Silk thread, Embroidery, 92x82cm
Memory Bricks-Hongkong, 2025, Silk, Silk thread, Embroidery, approx. 20x45cm(5piece)
Stitched Steps-Sang Mooks Camino Map (Detail), 2025, Silk, Silk thread, Embroidery, 89x245cm
Stitched Steps-Sang Mooks Camino Map, 2025, Silk, Silk thread, Embroidery, 89x245cm
Threaded Sello, 2025, Korean Paper, Silk thread, Embroidery, 35x80cm
UPCOMING : Itinerary 새겨 놓은 기록 | 이세정

 

 

 

 

 

 




Hakgojae Art Center  
B1F

2025.11.11-11.18


 




가장 사소한 기념비


약도를 그리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 중요하게 여기는 지형지물과 기호, 장면을 중심으로 지도를 표기하기 때문이다. 약도를 그릴 때 우리는 객관적인 거리의 모습이 아니라, 개인의 시선으로 본 풍경, 길을 걸었던 경험과, 그 공간에서 쌓인 기억의 순서를 그린다. 여기에는 그린 사람의 기억과 감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흔히 지도는 객관적 정보라고 생각하지만, 그 속에는 정치·사회·문화적 맥락이 엮여 있다. 드러내고 싶은 것, 감추고 싶은 것들이 지도의 레이어 사이에 숨어 있다. 지도란 온전히 객관적일 수 없는 세계의 표면이다.
섬 유에 바느질로 지도를 그리는 이세정의 작업 또한 현실의 복제가 아니라 기억과 감정의 결을 따라 그려진 장소의 초상이다. 그는 여행한 도시의 지도를 천 위에 옮기며 그 위에 사적인 상징들을 수놓는다. 시작은 가족 방문과 학업으로 자주 여행했던 파리의 지도를 표현한 <Plan de PARIS>(2011)였다. 실제 지도 제작에서 지형과 고도, 도로망, 필지, 행정구역, 건물 등 다양한 정보층이 평면 위에 중첩되듯, 작가는 노방실크를 세 겹으로 쌓아 공간을 재구성했다. 가장 아래층에는 도로망, 다음 층에는 강과 지하철, 정원 같은 지형적 요소가 수놓아져 있다. 이어서 맨 위층에는 에펠탑과 개선문처럼 누구나 알 수 있는 도시의 랜드마크지만 작가의 개인적인 인상이 담긴 곳, 그리고 자전거와 디저트, 구두 등 내밀한 기억을 담은 일상적 기호가 자리한다. 작가는 두 발로 걸으며 체득한 경험과 기억을 여행 중 파리의 수예점에서 구입한 실로 수놓아 물성을 부여했다.

사적인 지도
이세정의 지도는, 이렇게 객관적인 공간 위에 사적인 시간의 흔적을 덧입힌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b.1884)는 우리가 외부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면에 새겨진 기억과 감각에 겹쳐서 바라본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공간은 정보의 총합이 아니라 인간이 기억과 감정으로 다시 새긴 심리적 공간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영혼에 새겨진 들판의 지도” 를 가지고 있다. 바깥 공간을 체험한다는 것은 이 지도에 또 하나의 선을 덧그리는 일일 것이다. 
오랫동안 여행지의 지리적 구조와 기억의 중첩을 탐구해온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이러한 기억의 레이어를 한층 더 밀도 있게 확장한다. 2018년에 작업한 피렌체 여행 장면들이 신작 <Firenze Map>(2025)으로 재탄생하고, 어린 시절부터 여행 다녔던 홍콩의 기억은 <Hongkong Map>(2025)으로 탄생했다. 이 지도들 또한 파리의 지도와 같은 방식으로 도시의 지형과 작가의 사적 기억이 중첩되어 있다. 또 다른 신작 <MemoryBricks - Hongkong>(2025)이 흥미로운데, 수년간의 재방문을 통해 쌓인 기억을 블록이 쌓인 형태로 시각화한 작품이다. 오래된 기억과 현재의 풍경이 아래에서 위로 쌓이며 점점 색이 연해지는 구조를 가진 이 작품은, 시간이 위로 축적되는 지층의 형상을 닮았다. 작가가 홍콩에서 보낸 시간은 옆으로 펼쳐지지 않고 위로 쌓이며 공간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또 다른 신작 <Stitched Steps: Sang Mook’s Camino Map>(2025)에서는 평생의 꿈이었던 산티아고 순례길로 여행을 떠난 아버지의 기억과 한국에서 아버지의 여정을 실시간으로 도왔던 딸의 기억이 한 화면에 교차한다. 아버지가 실제로 걸었던 경로, 딸에게 많이 이야기하셨던 이미지들, 아버지의 글씨체가 딸의 바늘로 지도 위에 수놓아졌다. 밀도 높은 옥사 실크에 아버지의 용기와 딸의 염려가 진하게 밀착된다. 그리고 순례길을 안내하는 노란 조가비와 '부엔 까미노(Buen Camino)'라는 인사말, 여정 중 모은 도장 이미지들은 별도 화면에 제작되어 이 여정을 상징하는 모뉴먼트(Monument)가 되어 지도를 입체적으로 확장한다. 
이세정이 머문 도시들은 모두 다른 시간과 감정의 레이어를 품는다. 그의 작업은 거대한 현실의 질서 위에 그려진 사적인 감정의 지형도를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 일이다. 얇은 노방실크가 겹쳐질수록 아래의 이미지는 더 희미해지며 도로망, 지하철 노선 같은 객관적인 정보가 아래로 가라앉는다. 대신 기억과 감정이 표면 위에 또렷하게 떠오른다. 천이 겹치는 틈마다 시간을 담은 공기가 스민다. 지도 위로 우리가 알지만 모르는 도시가 재건된다. 지도는 어느새 현실의 좌표가 아니라 기억이 머무는 거처가 된다. 한 사람이 통과한 시간이 여기 쌓여 있다. 

기억을 당기고 여미기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b.1859)은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위로 쌓이는 형태라고 했다.  과거의 잔상(retention), 현재의 인상(impression), 미래의 예감(protention)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포개지며 한순간에 공존한다. 이세정이 쌓는 반투명한 감각의 레이어와 기억의 블록은 바로 그 시간의 구조를 눈에 보이게 드러낸다. 시간은 점점 멀어지는 대신 아래로 밀리며 포개진다. 그러나 얇디얇은 시간의 막이 쌓이고 또 쌓일지라도, 존재했던 기억은 은은하게 투과되어 드러난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이곳에 겹쳐서 함께 머문다. 우리는 언제나 과거, 현재, 미래의 총합으로서 ‘지금-여기(now-here)’ 존재한다.
한편, 이세정이 손으로 실을 꿰고 당기며 수를 놓는 과정은 시간 속에서 흩어진 기억을 여미는 행위다. 작가는 볼륨을 살리는 전통 자수의 방식 대신, 선적인 감각을 강조하는 푼사와 이음수 기법을 사용한다. 드로잉의 형태로 시간의 흐름과 감정의 결을 따라가려는 것이다. 기억은 언제나 흩어지려는 성질을 가지지만, 작가의 손은 반복되는 작은 손짓으로 그것을 고정한다. 여기서 바느질은 공예적 행위가 아닌 몸이 지나간 흔적이 되고, 바늘은 기억을 잇는 도구가 된다.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 b.1961)은 걷기를 바느질에 비유했다. 걸어가는 사람은 바늘, 걸어가는 길은 실이며, 걷기는 찢어진 것들에 맞서는 일이라고 했다.  실이 천을 드나들며 침투하면서 한 땀 한 땀 이미지가 새겨진다. 마치 여행자가 두 발로 걸으며 낯선 도시에 침투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을 새기며 공간과 섞이는 것처럼. 공들여 반복하는 행위로서 기억은 비로소 형태를 얻는다. 어떤 이유에서든,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일 테다. 어떤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감정과 가치관, 나아가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래서 사적인 기억의 조각을 모으면 한 사람이 존재하는 방식을 느낄 수 있다. 찢어지고 흩어진 것들을 봉합하여 고정하는 일은 존재의 방식을 세우는 일이다. 

생을 품는, 부드러운 모뉴먼트
이러한 봉합은 기념의 태도로 이어진다. 이세정은 <Palpiter>(2022)에서 문고리, 기둥 같은 사물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얇은 노방실크로 만든 입체 구조 위에 수놓는다. 이어서 <Soft Monument>(2025)에서는 건축물의 요소를 본 따 노방 실크로 입체 조형물을 만든다. 구체적 장소는 식별되지 않지만, 그 이미지들이 하나의 모뉴먼트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여행 중 작가의 내면에 스쳐간 감정의 기호이자, 사적인 기억의 상징이다. 
작가는 손의 움직임을 통해 이를 기념의 형상으로 전환한다. 바슐라르는 '있었던 그 일들은 과연 있었는가?'라고 물으며, 우리의 기억과 감각이 그 일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세정의 바느질은 과거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 일들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는가 묻는 행위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기에 기념하고, 기념함으로써 기억한다. 모뉴먼트란 결국 기억에 물성을 부여하는 장치다. 이세정이 만드는 사적인 모뉴먼트는 자신의 삶이 지나간 자리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있었던 일'로 남기려는 시도다. 그것이 아주 사소한 장면일지라도. 
이 모뉴먼트는 단단하지 않다. 빛이 드는 방향에 따라 색이 달라지고 바람에 흔들린다. 시간이 지나며 덧입혀지거나 확장되기도 하는 유연한 구조물이다. 완결성을 지향하는 공예의 태도 대신, 변화를 포용하며 미래를 지향한다. 그리하여 이 부드러운 기념비는 돌이나 금속처럼 변치 않는 물성에 권위를 고정한 전통적 기념비와 달리, 얇고 유연한 천 속에 보이지 않는 감정과 감각을 품는다. 이 부드러운 형태 안에 사소함으로 삶을 질기게 잇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이세정의 부드러운 모뉴먼트는 기억이 덧입혀질수록 깊어지는 삶의 생동을 품는다. 
사소하고 연약한 것들은 쉽게 간과된다. 얇은 천, 가느다란 실, 작은 발걸음, 사적인 기억, 내밀한 감정, 찰나의 시간 같은 것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은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눈에 띄는 거대한 질서의 틈은 사소하고 연약한 것들이 지탱하고 있다. 때문에 개인의 서사를 드러내며 사소한 기념비를 곳곳에 세울 때에 우리의 세계는 더욱 유연하게 부풀어 오른다. 부풀어 오르며 생겨난 여백에는 더 많은 개인의 서사가 틈입할 여지가 생긴다. 개인적인 행위로 시작한 이세정의 바느질은 이렇게 타인의 기억과 감정이 머물 수 있는 여백을 만든다. 이 여백으로부터, 누구나의 마음속에 있는 들판의 지도가 펼쳐진다.



김지연 (미술비평가)





 

작가노트 – ‘Itinerary 새겨 놓은 기록’



나에게 자수는 손끝의 인내와 시간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내는 기억의 기록 방식이다. 바늘이 천을 뚫고 실로 단단하게 천 위에 새겨지는 것처럼 쉽게 잊혀질 수 있는 소중한 경험과 감정들을 더욱 견고하게 내면에 저장하는 표현 방법이다. 이러한 반복의 과정은 단순한 수공예를 넘어, 시간과 감정, 노동이 응축된 예술 행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나의 작업은 여행과 일상 속에서 마주한 장면과 감정들을 담아내는 일종의 시각적 일기이다. 여행 중 스쳐 지나간 거리의 풍경, 우연히 마주친 빛의 색감, 혹은 순간적으로 느꼈던 감정들은 자수라는 매개를 통해 새로운 형태로 되살아난다.
실과 바늘로 드로잉하듯 자유롭게 수를 놓는 행위는 잊히기 쉬운 경험을 다시 불러내는 과정이자, 그것을 내 안에 단단히 새겨 넣는 의식과도 같다. 그렇게 완성된 자수의 표면에는 시간의 결, 그리고 그 안을 채운 감정의 흔적이 켜켜이 남는다. 나에게 자수는 단순한 재현이 아닌, 기억을 되살리고 다시 살아 숨 쉬게 하는 예술적 언어이다.
지도는 나에게 언제나 특별한 상징성을 지닌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아직 한 번도 밟지 않은 땅을 구글지도 속에서 탐색하는 그 시간은 상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전체 여정 중 가장 설레는 순간이기도 하다. 지도는 낯선 장소의 첫인상이자, 다가올 여행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이 응축된 감정의 표면이다.
나는 지도 제작의 방식, 즉 여러 정보층이 중첩되어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구조에 주목했다. 지형, 도로, 건축물, 장소 등이 층위를 이루듯, 나의 작업에서도 얇고 투명한 노방실크를 겹겹이 쌓아 올린 레이어 위에 실로 드로잉하며 시간과 기억을 기록했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공간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의 설렘과 개인적인 감정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행위이다. 실과 바늘로 이어진 선들은 내가 지나온 혹은 아직 만나지 못한 장소들을 향한 사유의 흔적이자, 내면의 여정을 시각화한 지도로 남는다.
〈Stitched Steps : Sang Mook's Camino Map〉는 아버지의 오랜 버킷리스트였던 산티아고 순례길의 여정을 기록한 자수 지도이다. 길이 245cm에 달하는 이 대형 신작은, 나의 섬유 지도 작업 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과 인내, 그리고 집중을 요구한 작품이었다.
이 작업은 내가 직접 순례길을 걸은 기록이 아니라, 아버지의 여정을 함께 따라 걷는 마음으로 완성한 간접적 동행의 기록이다. 순례 기간 동안 GPS 앱, 실시간 메시지, 그리고 구글 스트리트 뷰를 통해 매일의 길을 조사하며, 마치 그 길 위를 함께 걷는 듯한 생생한 경험을 느꼈다.
약 40일간 이어진 그 시간 동안, 아버지와의 대화와 사진, 그날의 풍경이 실 한 올 한 올에 스며들었다. 순례의 경로와 자수의 작업 순서를 동일하게 맞추며, 아버지의 수많은 발걸음이 지도의 선 위에 한땀 한땀 이어지도록 했다.
〈Stitched Steps : Sang Mook's Camino Map〉은 단순한 여행의 기록이 아니라, 여정의 기억을 실로 엮은 시간의 지도이다.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은 곧 아버지와 함께 그 길을 되새기는 여정이었으며, 그 시간들은 내게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전 〈Plan de PARIS〉 작품의 연장선으로, 홍콩과 피렌체의 자수 지도 작업을 새롭게 선보인다. 이전 작품들이 완성된 자수를 액자나 틀 안에 고정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다면, 이번 신작에서는 노방 실크의 투명성과 공기를 머금는 물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천을 그대로 설치함으로써, 실크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빛과 그림자가 겹겹이 스며드는 공감각적 경험이 확장되도록 설계했다.
각 지도 옆에는 여행지에서 그렸던 간결한 여행 드로잉을 선적인 자수 기법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함께 배치했다. 이 작은 자수 드로잉들은 지도의 이미지와 이야기로 이어지는 시각적 단서이자 감상의 실마리로서, 관람자가 지도를 탐색하는 또 다른 즐거움을 제공한다.
한땀 한땀 실로 새겨진 이 ‘기억의 지도’들은 나에게는 오랜 시간과 정성의 기록이지만, 관람자에게는 각자의 경험과 감정에 맞닿는 새로운 풍경이 되기를 바란다.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장소에 대한 그리움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새로운 여행을 향한 설렘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천 위에 남겨진 실의 흔적들이 각자의 기억 속 이정표가 되어, 삶의 소중한 순간을 다시 떠올리게 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