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안내
정철교 | 아름다운 강산
Hakgojae Artcenter 1F
2026. 10. 13 - 10. 17
풍경은 무엇을 기억하는가
― 정철교의 〈아름다운 강산〉, 사라지는 현재를 기록하는 감각의 아카이브
김종기 | 미술평론가·철학박사
풍경은 말이 없다. 바다는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말하지 않고, 길은 누가 떠났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 한 장소를 바라본 사람에게 풍경은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사람이 떠난 집 한 채, 바닷가의 방파제, 산비탈을 돌아가는 길 하나에도 시간이 배어 있다. 눈앞에 있는 것은 공간이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시간이다.
정철교의 풍경도 그러하다. 그는 산과 바다와 집의 외형을 옮겨놓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스며든 시간을 그린다. 더구나 그는 이 장소들을 밖에서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다. 서생과 신리, 신암, 나사리, 월내리에서 살아왔고, 길을 걷고 바다를 바라보며 원전과 공단이 삶의 풍경을 바꾸어가는 시간을 몸으로 겪어왔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 스며 있는 냄새와 불안, 사라짐의 감각은 멀리서 수집한 정보가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온 몸의 기억이다.
전시 제목 〈아름다운 강산〉은 그래서 처음부터 조금 불편하다. 산과 바다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속에는 원전 건설로 인한 강제 이주와 삶의 터전 상실, 공동체의 해체와 생존의 시간이 포개져 있다. 정철교가 그리는 아름다움은 상처 이전의 순수한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안고도 여전히 살아 있는 세계의 아름다움이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를 매끄럽게 이어지는 연속된 시간으로 보지 않았다. 과거의 진실은 때로 작은 파편 속에서 섬광처럼 나타난다. 정철교의 그림에 등장하는 작은 튜브 하나, 파라솔 하나, 해변의 사람, 길가의 나무 한 그루도 그러하다. 역사는 발전소가 언제 세워졌고 도로가 언제 개통되었는지는 기록하지만, 사람들이 어느 여름 오후를 어떻게 보냈는지까지는 좀처럼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은 대부분 그런 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정철교가 붙잡는 것은 거대한 역사 뒤편의 작은 역사, 아직 존재하지만 이미 기억이 되어가는 현재다. 그의 그림을 ‘사라지는 현재의 아카이브’라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색채 역시 기억한다. 붉은색은 생명의 색이면서 상처의 색이다. 핏줄처럼 화면을 흐르는 붉은 선은 상처 입었음에도 아직 살아 있는 장소의 ‘역사의 혈관’처럼 보인다. 그 사이에서 솟아나는 녹색은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단순한 낙관이 아니다. 테리 이글턴이 말하는 ‘낙관하지 않는 희망’처럼, 상처를 알고도 다시 자라나는 생명의 색이다.
그리고 정철교의 노란 하늘에는 냄새가 있다. 온산공단에서 불어오던 악취의 기억이다.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이 실제로 들이마신 공기이며, 코와 목과 피부에 남은 생활의 감각이다. 이 대목에서 메를로퐁티의 지각론을 떠올릴 수 있다. 인간은 눈이라는 하나의 기관으로만 세계를 만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몸 전체로 세계와 관계한다. 그래서 정철교의 노란색은 눈으로만 보는 색이 아니다. 냄새를 가진 색이다. 색은 냄새를 호출하고, 냄새는 기억을 호출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회화는 시각의 기록을 넘어 ‘감각의 아카이브’가 된다.
정철교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것을 기록한다. 지도에는 도로와 건물과 산업시설은 표시되지만, 냄새와 불안, 떠나야 했던 사람의 기억은 표시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풍경은 하나의 ‘대항적 아카이브’라 할 수 있다. 공식 기록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공식 기록이 보지 못한 삶의 흔적을 다른 감각의 방식으로 현재에 불러낸다는 뜻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와 예술이 만나는 지점을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서 찾았다. 무엇이 보이고 들리며, 누가 말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감각적 질서가 있고, 정치는 그 질서를 다시 나누고 재구성하는 데서 발생한다. 정철교의 그림에는 구호가 없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고, 기록되지 않았던 평범한 삶을 기억하게 한다. 예술의 정치성은 반드시 목소리를 높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무엇을 볼 것인가를 바꾸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철교의 풍경은 정치적이다. 자연과 인간의 삶, 산업과 권력, 원전 건설과 이주의 기억이 이미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스크〉에 이르면 시선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수많은 붉은 선으로 이루어진 얼굴은 한 사람의 초상이면서 동시에 그가 오래 바라보아온 풍경의 얼굴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그 얼굴을 바라보지만, 어느 순간 그 얼굴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메를로퐁티가 ‘가역성’이라 부른,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얽힘이 여기에서 다시 떠오른다. 풍경을 보는 일은 결국 그 풍경을 통해 우리 자신의 위치가 드러나는 일이기도 하다.
정철교의 화면에는 붉은 상처가 있고, 흰 빈자리가 있고, 노란 냄새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녹색 생명이 솟는다. 그의 그림은 풍경이면서 기록이고, 기록이면서 증언이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자료들의 보관소가 아니다. 그 아카이브에는 아직 피가 흐르고 냄새가 남아 있으며, 사라진 것의 빈자리 사이에서 다시 풀이 돋는다.
강산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이제 그 아름다움은 무구하지 않다. 그 안에는 역사가 있고, 상처가 있고, 떠난 사람이 있고, 냄새가 있고, 기억이 있다. 그래서 정철교의 풍경 앞에서는 결국 하나의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이 모든 것을 본 뒤에도 우리는 이 강산을 단지 아름답다고만 말할 수 있는가?
아. 름. 다. 운 강산
정철교
1970년 말과 1980년대에 크게 유행했던 가수 신중현의 노래
‘ 아. 름. 다. 운 강산’을 떠올려 본다
그 당시 나의 나이도 20, 30대라 충분히 그의 노래에 공감하고 좋아하며 부르기도 했었다
특히 ‘아. 름. 다. 운 강산’의 가사가 마음에 들었었고 지금도 머릿속에 맴돌곤 한다
그동안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바뀌었고 시대상황도 다양화되었다.
그 시대는 빈곤과 결핍도 있었지만 꿈과 희망과 아. 름. 다. 운 강산이 있었다.
맑은 푸른 하늘과 향기로운 실바람, 구름은 하얗고, 나무는 푸르고 ,
강물도 푸른 이곳에서 부푼 내 마음도 있었다.
너와 내가 손잡고 희망찬 저 광야로 달려보자, 그리고
아. 름. 다. 운. 이 땅 위에 태어나고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태양.
파란 바다, 이 얼마나 좋은가?
영원히 이곳에 새 꿈을 만들고
사랑하는 가족을 만들어 라는 그때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현재 내가 살고있는 이곳 서생을 생각해본다
하늘은 노랗고, 구름도 노랗고
실바람에 불어오는 공기는 쐐 한 악취가 진동하여 호흡이 힘들고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태양이 비추는 사랑하는 우리 가족과 함께 사는
이곳 서생은 북쪽에 울산 온산공단이
남쪽으로는 세계최대의 원전 밀집 지역인(원전 돔 10기)
고리 원전 인근에서 살며 언제나 불안해서 전전긍긍하며 지내는 이곳.
먼 훗날에도 너와 내가 살고지고 새 꿈을 만들어 보고픈 영원한 이곳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원전 돔과 공존 해야 하는 이곳.
언제 돌아올지 모를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파란 물결 넘치는
저 바다와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향기로운 실바람도 불어오고, 붉은 태양이 비추는 곳이기를 바라며
사라지는 마을과 이 환경에서 살고있는 사람들과 공기와 풍경들을 기록하고
또 되살리고 싶은 바람으로
우리 몸속에 넓게 퍼져 있는 핏줄 같은 붉은 색 선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원색의 색채로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나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신중현씨의 노래 아. 름. 다. 운 강산을 흥얼거려 본다
2025.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