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안내
A shining girl, 2024, acrylic on canvas, 53.0x40.9cm
An energy forest, 2024, acrylic on canvas, 45.5x37.9cm
An energy rock, 2024, acrylic on canvas, 45.5x37.9cm
An energy tree, 2024, acrylic on canvas, 45.5x37.9cm
An energy valley, 2024, acrylic on canvas,, 45.5x37.9cm
Conversation 대화, 2024, acrylic on canvas, 53.0x45.0cm
별들의 유희 Stellar play, 2024-2025, acrylic, oil on canvas, 150x150cm
에너지 덩어리, 2024-2025, acrylic, oil on canvas, 97.0x324.4cm
UPCOMING : ‘Energetic Flow’, 보이는 것 너머의 것들 | 홍수정

 

 

 

 

Hakgojae Art Center  
1F

2025.10.22-11. 1

 





‘Energetic Flow’, 보이는 것 너머의 것들
‘Energetic Flow’, Beyond the Visible




홍경한(미술평론가)

1.
홍수정의 근작은 대체로 추상과 구상을 넘나든다. 일상적 장면과 상상력이 빚은 광경이 교차한다. 하지만 추·구상을 불문하고 재현이나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화면 위로 소환되는 것은 사물의 외형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잠재된 힘의 흔적이며 지각의 주변부에서 아슬아슬하게 감지되는 ‘진동’과 ‘흐름’이다. 
<끝나지 않은>(2019)은 이러한 진동과 흐름이 어떻게 시각화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분홍빛 바탕 위에 두텁게 올린 물감의 제스처와 얇은 선(線)적 움직임이 교차하면서 시각적 긴장을 형성하고 있는 이 두 폭(diptych)짜리 그림은 추상화된 실루엣과 겹겹이 쌓인 질감에서 폭발적인 역동성이 드러난다. 분홍색과 녹색의 대비는 부드러움과 고요함, 강렬함을 뒷받침하며, 작품 전반을 감싸는 불확정성(uncertainty)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작은 캔버스 세 개를 연결한 2019년 작 <부드러운 공간>도 동일한 범주에 든다. 둘 다 공백과 흔적 속에서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작품이다.
자발적 이야기를 생성하는 작품엔 <에너지(energy)의 숨>(2025) 등의 추상 시리즈도 포함된다. 유기적인 형태들이 얽히고 겹치며 하나의 덩어리, 또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이 작업은 미세한 점과 얇은 선묘가 모여 군집을 형성하고, 마치 식물이나 세포 구조, 자연의 성장 과정을 해부하듯 치밀하다. 
붉음–베이지–녹색으로 된 이 시리즈는 내적 생동과 성숙, 변화, 회복, 확장 속에서 끝없는 순환성을 암시한 채 자아와 욕망, 의식과 무의식을 내재한 듯 자유롭게 얽히면서 불완전한 질서와 순환 원리를 머금고 있다. 
<에너지의 숨>이 마치 생명의 미시적 군집—세포, 식물, 미생물 등—을 통해 보편적 생명 원리와 집합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의 질문에 근접한다면, 굵은 붓질과 질감, 색채의 덩어리감이 강조된 <끝나지 않은>은 하나의 서사가 완결되지 않은 채 중첩되는 상태로써, 개인의 내면적 풍경 혹은 감정의 변화를 투사하는 방식을 지닌다. 즉, 전작은 미시적 축적을, 후작은 분출과 같은 거시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구분된다. 
그러나 <에너지의 숨> 연작은 <끝나지 않은>에 비해 활발한 느낌은 덜해도 주 작품 모두 어떤 알 수 없는 순환성과 그것을 연결하는 ‘에너지’를 함유한다는 점에선 대동소이하다. 진동과 흐름이란 측면도 동일하다. 그렇다고 홍수정의 작업에서 에너지가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인간 존재와 성(性)·생명력, 죽음 같은 근원적 주제와 연결되는 쿠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기호적 도상을 연상케 하고, 장르는 다르지만 <움직임의 연속성>처럼 속도와 운동 에너지를 형태화한 움베르토 보치오니(Umberto Boccioni)의 미래주의(Futurist sculpture) 작업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홍수정의 그림에서 에너지는 이동과 변환 속에서만 드러나는 ‘비가시적 힘’이라는 점에서 간극이 있다. 

2. 
홍수정 작업의 중요한 특징이 비가시적 힘이라면 그 배후엔 ‘파동’에 있다. 비록 근래 작품 곳곳에서 원(圓)과 나선형 곡선(spiral curve) 또는 소용돌이 모양의 이미지, 꽃잎 같기도 하고 조개류의 외형을 닮은 기호적 도형들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에너지를 도식화한 것으로,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히 이어지는 흐름을 상징한다.
이 가운데 원(圓)은 대개 의도적으로 나열되는데, “외부에서 안으로 모이는 힘을 연상하는 표현이자, 에너지가 모이고 흩어지는 운동성”이다. 하지만 이는 동양철학의 시각에서 보자면 시간관(時間觀) 아래 유지된다. 여기서의 시간관이란 과거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없는 균질적이고 직선적인 서양에서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의 성질이 아닌, 동양의 60갑자, 불교의 윤회설, 만다라 등에서도 보이는 ‘순환적’인 성격을 내포한다. 
그렇지만 화면에 듬성듬성 놓이거나 때론 빼곡히 채워지기도 하는 그의 원이 파동을 생성하는 근원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힘에 관한 ‘감각의 가능성’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만 기능한다. <소리가 나지 않게>(2018)는 그 감각의 가능성을 설명하기에 알맞다. 흡사 대지와 하늘을 병치시킨 듯한 이 작품은 유독 정적(靜的) 여운이 강하다.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야말로 은밀한 파동이 진동하며, 소리가 제거된 대신 감각 간 전이와 확장성이 녹아 있다.
홍수정 작업에서 탐지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반복’에 의한 음향이다. 그는 얇은 필치로 수많은 선을 긋고 각인하는데, 그 결과 선들은 화면 위에서 중첩된 채 증식되고,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나타나거나 배경이 되며, 흐름을 잉태하는 조형요소로 작동한다. 다양한 도형들이 반복적으로 새겨지면서 작가 작업의 특성을 고착시킨다. 
이 반복은 기계적 중첩이긴 해도 매번 다른 목소리를 잉태한다. 어느 땐 낯설고도 친숙함을, 종종 친숙하지만 낯선 분위기 형성에 일조한다. 비교적 구상적인 작업 <Spring>(2020)과 <wait1>(2020)은 이 반복된 선에 의한 음향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짧고 가는 선들로 구성된 <Spring>은 밝고 투명한 화면에서마냥 따뜻한 봄날의 생명력이 지배한다. <wait1>은 고요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이제 막 산포되려는 듯한, 그러나 아직은 제자리에 멈춰 있는 시간의 축적을 담고 있다. 
<안녕의 온도>(2021)와 <초록>(2021)과 마찬가지로 두 작품에는 예의 트레이드마크인 기호적 도형 혹은 문양이 없다. 그럼에도 얇고 가는 단선이 중심이나, 동일한 반복성이 특정한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로 변주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지적 자연이 어떻게 정신적 사유를 촉발할 수 있는지를 고지하는 작업들이다.
2024년 작품 <An energy valley>는 제목자체에 이미 에너지를 삽입함으로써 주제의식을 명료히 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는 절벽 사이로 흘러내리는 폭포의 이미지가 자리하고, 바위와 수풀의 표면 위에는 에너지를 상징화한 소용돌이 문양(나선형, 원형 드로잉)이 겹쳐져 있다. 이는 자연의 단단한 구조 위에 덧입혀진 비가시적 에너지의 흔적으로, 밝고 평온하게 처리된 화면 상단의 수평선 너머와 아래의 밀도 높은 계곡과 대조됨으로써 개방과 해방의 공간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이 풍경은 지형으로서의 계곡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에너지가 흐르고 모이는 장소로, 보이지 않는 힘이 응축되는 심리적·우주적 공간에 가깝다. 또한 화면 속 반복되는 문양 혹은 도형은 그의 여러 작품에서 열람되듯 동양적 세계관의 기운(氣運)과 연동되며, 동시에 미시적 구조(세포, 원자, 에너지 파동)로 시선을 옮기게 하는 장치다. 따라서 <An energy valley>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그린 사실주의적 작업이 아니라, 풍경을 통해 에너지의 존재와 흐름을 시각화한 회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An energy valley>는 그의 또 다른 작품 <An energy rock>(2024)와 <An energy tree>(2024) 등과 함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겹쳐 놓음으로써, 풍경을 물리적 장소에서 존재론적 공간으로 확장하거나 자연 속에서 느껴지는 생명력과 에너지의 교차를 탐구하는 현대적 산수화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자연을 통해 내면의 에너지와 현실의 질서를 사유하게 만드는 회화라 해도 무방하다. 이 중 <An energy rock>, <An energy tree>은 암석과 나무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구상과 경계를 허문 채 자연과 에너지가 서로 등가적 관계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업이다.

3.
홍수정의 작업의 다수는 자연과 인간을 주인공으로 한다. 작가는 근작을 설명하면서 에너지에 방점을 두었지만 필자에겐 인간과 자연, 예술과 삶이 연결된 ‘사유’로 다가온다. 인간의 삶, 다시 말해 태어나고 성장하며 소멸하여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자연의 그것과 닮아 있는데다, 그의 작품 곳곳에 놓인 인간 형상(매우 작게 혹은 크게 등장한다)에서도 유사한 흐름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안녕의 온도>와 <초록>은 이러한 사유성을 효과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안녕의 온도>는 안녕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진 않고 사람도 없지만 적막함으로 채워진 땅 위 군데군데 자란 풀을 통해 감정의 층위가 형성되어 있음을 목도케 한다. <초록>은 <안녕의 온도>와는 달리 자연의 생명력이 화면 전체로 확산되는 양태를 보인다. 두 작품은 약간 상반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그 자체로 회화성이 돋보인다는 점에선 분모가 같다. 에너지를 상징하는 도형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에 상응하는 힘이 묻어난다.
비교적 대작에 속하는 <별들의 유희>(2024, 150×150cm, 정사각형 작품)와 <Conversation>(2024)은 홍수정이 설정한 방향성에 부합한다. <별들의 유희>는 밤하늘의 별들이 서로 교차하며 발산하는 에너지를 거대한 화면 속에 담아낸, 온갖 동물들과 사물(인간, 고래, 말, 사슴, 종이배, 행성 등등)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어느 땐 암각화(巖刻畵)처럼 새겨진 작업이다. 바탕은 원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그 어느 작품보다 도형이나 문양이 많다. 인간형상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심연(深淵) 같은 배경 위에 수많은 기호, 도형, 동물, 건축물, 그리고 자연의 파편 같은 이미지들이 떠다니는 듯 배치된 이 작품은 숲과 바다, 혹은 우주 공간을 연상시키는데, 특정한 ‘장소’라기보다는 상상력 속 무한한 차원이라는 게 옳다. 작은 선묘(線描)로 표현된 기호들은 과학적 도면, 우주적 별자리, 신화적 도상, 아동적 낙서의 성격을 지니며, 이는 세계가 단일한 질서로 설명되지 않고, 과학·신화·기억·놀이가 혼합된 다층적·순환적 우주라는 작가의 의식을 엿보게 한다. 
필자의 기준이긴 해도 근작 중 가장 와 닿은 작업은 <Conversation>이다. 인간과 자연, 예술과 삶이 연결된 사유, 즉 인간과 자연의 관계, 나아가 관객과 작품의 관계를 대화적 구조로 직조한 이 작품은 <안녕의 온도>나 <초록> 못지않게 회화성이 돋보인다. 작품은 자연 속에서 발현되는 존재의 흔적을 쫒지만, ‘빛을 품은 인물 형상’을 중심에 배치해 다소 몽환적이고도 쓸쓸한 감정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화면 상단의 강렬한 붉은 하늘은 어떤 상황이 극도로 긴장된 순간 혹은 초현실적 상태에 들어섰음을 암시하고, 화면 중앙의 숲은 어둠 속 경계처럼 들어서 있다. 화면 하단에 자리 잡은 풀밭은 정교한 붓질로 묘사되어 세속적 현실을 대입케 한다. 이어 빛을 발산하며 풀밭 속에 서 있는 두 형상은 현실의 물질적 질감과는 대비되는 초월적 존재다. 
작품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두 발광체는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 보이지만, 흥미롭게도 이들은 입을 통해 언어를 주고받는 존재가 아니라, 빛으로 서로를 확인하고 공명하는 존재다. 대화는 문자와 그림 등의 사회적 관습체계가 아닌 존재적 교류로 이어지며, 인간의 문법을 넘어서는 근원적 소통 방식으로 전개된다. 모르긴 해도 이 작품을 그릴 당시 작가는 그 어느 때보다 내적 울림을 체감했을 것이고, 필자가 그러했듯 보는 이들 역시 그 어느 작품 보다 의식 속에서 대상을 붙잡고 검토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 활동을 경험하게 된다.
참고로 <Conversation>은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살(la chair)’ 개념과 연결될 수 있다. 퐁티가 말하는 ‘살’은 주체와 객체,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사이의 원초적 통일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살’은 세계와 의식 사이의 교차점이자, 가역성(reversibility)의 원리가 작동하는 장소다. 
주목할 점은 두 발광체가 서로를 향해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개별 존재가 아닌, 상호주체적 만남의 현장을 암시한다. 이에 다시 퐁티의 주장을 빌리자면 타자와의 만남은 언제나 감각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이때 ‘살’은 나와 타자를 분리시키면서도 동시에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그림 속 발광체들 사이의 거리감과 동시적 현존감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관계성을 시각화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Conversation>은 언어적 소통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공명에 방점을 둔다. 두 발광체 사이에서 일종의 말 이전의, 몸 이전의, 그러나 동시에 말과 몸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소통을 말한다. 이를 우린 흔히 ‘침묵하는 로고스(logos silencieux)’라고 한다. 두 형상 사이에는 에너지만 떠돌 뿐 말은 오가지 않으나, 그들의 현존 자체가, 그들이 서로를 향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깊은 소통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개념적 언어로는 완전히 포착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의미의 층위를 가리킨다.

4.
위에서 언급한 작업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연과 풍경, 추상과 구상을 왕래한다. 하지만 그 심층에는 일관된 맥락이 있다. 앞서도 말했듯 그것은 곧 에너지라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근래의 작업에서 유독 강조되고 있는 이 에너지는 존재의 생성과 관계의 본질을 설명하는 원리로서 작가의 화면에 곧잘 배치된다. 예를 들면 완결되지 않은 세계를 제시하는 <에너지의 숨>을 비롯해, <끝나지 않은>, <소리가 나지 않게>, <An energy valley>, <An energy rock>, <An energy tree>, <별들의 유희> 연작, <Energy drawing>(2022), <Energertic Flow(2022) 시리즈, <Energy planter>(2023), <Conversation> 등이다. 이들 모두 에너지(라 지정된)를 함유하고 있다.
에너지는 작가에 의해 작품마다 심어진다. 바위와 숲이 열어둔 틈새를 따라 흘러드는 황금빛의 기운을 담아낸 <An energy valley>에서 계곡은 에너지가 모이고 흘러가는 통로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기(氣)’ 개념과 연결 지어 본다면, 여기서의 계곡은 곧 ‘기혈(氣穴)’, 즉 대지의 ‘숨-구멍’ 같은 장소다. 작가는 풍경을 재현하지 않고, 그 속에 감응하는 힘을 시각화함으로써 자연이 지닌 원초적 생명력에 대해 피력한다. 자연은 바라보는 대상에서 벗어나 우리를 감싸며 호흡하는 유기적 장(場)이다.
<별들의 유희>에서는 시선이 지구적 차원에서 우주로 확장된다. 화면을 가득 채운 초록빛의 심연 위로 수많은 인간과 동물, 사물이 기호처럼 흩어져 있으며, 에너지는 더 이상 한정된 흐름이라기 보단, 우주적 차원에서 존재들이 서로 얽히고 풀리는 유희적 힘으로 나타난다. 
이는 형식상 상형문자 같은 도형과 리듬감 있는 점·선 배열을 통해 생명의 율동과 우주적 에너지를 표현해 회화가 하나의 ‘생성 과정의 지도’처럼 여기게 하는 파울 클레(Paul Klee)의 그림들과, 신지학적·영적 세계관 속에서 원, 나선, 삼각형을 통해 ‘우주의 에너지 흐름’을 담아내는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의 작업, 보다 심오하게는 물질·신체·공간 사이의 관계를 기호적 패턴으로 전환하여, 생태적 에너지의 흐름을 가시화해온 줄리아나 곤고라(Juliana Góngora)의 작품과 맞닿지만, 미학적으론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말한 ‘세계-내-존재’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존재와 존재가 서로를 잇는 우주적 공명(cosmic resonance)이라고 봐도 상관없다. 작가는 이 그림을 통해, 에너지가 물리적 현상이아니라 상상과 창조의 근원적 바탕임을 보여준다.
가장 인상적인 작업인 <Conversation>은 우주적 차원에서 다시 인간적 차원으로 회귀한다. 붉은 하늘 아래 두 개의 빛나는 형상은 서로를 향해 발광하며 마주선 채, 침묵 속의 대화를 나눈다. 여기서 빛은 언어 이전의 교감이자, 존재와 존재를 잇는 관계적 에너지로 기능한다. 이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말한 ‘타자의 얼굴’과 상응한다. 타자는 언어를 초과하는 방식으로 다가오며,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응답을 시작한다. 작가가 그려낸 두 발광체는 바로 그 응답의 장면을 압축한 것이다.
이들 작품을 따라가면, 에너지는 단일한 물리량에서 이탈하여 존재를 잇는 원리로 생명성과 순환성, 자연성과 회귀성을 담보하는 다층적 상징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미완에서 시작해 자연을 거쳐 우주로 확장되고, 결국 인간과 인간의 대화로 귀환한다. 이 흐름은 기 언급했듯 ‘생성–자연–우주–관계’라는 존재론적 순환의 사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처럼 홍수정은 회화를 통해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전환하고, 보이지 않는 힘을 감각화하며, 반복을 통해 차이와 노동의 흔적을 기록한다. 에너지를 존재를 생성하고 연결하며 확장하는 궁극적 원리임을 밝히면서 인간과 자연의 순환에 대해 언급한다. 작가는 이를 ‘Energetic Flow(에너지의 흐름)’라 명명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닫힌 결과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주되는 과정 속에서 반복과 순환, 차이와 시간, 노동과 에너지가 복합적으로 얽힌 현재진행형의 미학을 드러내며, 예술을 하나의 열린 흐름으로 재규정한다. 이것이 홍수정 작업의 변별력이다. 

5.
재차 강조하면, 홍수정의 작업들은 미세한 선들의 중첩과 반복을 통해 음향적 울림과 에너지의 흐름을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특유성이 있다. 세밀한 필치가 쌓이며 화면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장(場)으로 확장시키고, 침묵과 격정을 오가며 감각적 긴장과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특성은 존재와 세계의 숨결을 시적(詩的)으로 만든다.
아쉬운 점은 표상이 작가의 의도를 완성도 있게 반영하진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기호적 패턴들은 다소 부자연스럽다. 작가는 “자연 속의 원형 패턴은 태양, 달, 물방울, 파동 등은 자연의 에너지가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며,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선 드로잉은 구름, 풀, 공기 등 자연의 흐름을 선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지만, 반드시 그런 흐름과 에너지를 여러 패턴이나 도형으로 나타내야만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사실상 이 도형들은 들뢰즈(Gilles Deleuze)가 말한 생성(generation)의 개념을 따르고, 세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힘들의 결합체임을 증거 하는 조형요소이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들은 그 힘의 잔여(殘餘), 혹은 흔들림의 기록으로써 적절히 반응한다. 물론 그 기록은 에너지로, 끝나지 않은 운동으로써 언제나 ‘이후’를 남겨둔다. 이후를 감각의 ‘여백’이라 봐도 무방하다.
다만 에너지의 도식화는 익히 긴 역사를 갖고 있어 신선한 조형어법이 아닌데다,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홍수정 회화의 장점이 되레 그것들의 가공성과 장식성으로 인해 희석되는 측면이 있다. 이런 경우는 통상 메시지를 명료히 전달하고자 하는 강박이 작용한 이유가 크고, 뭔가를 자꾸만 설명해야할 것 같은 심적 부담에 기인한다.
이는 몇몇의 작품을 비교하면 더욱 설득력 있다. 홍수정이 15년 전쯤 제작한 <Ophelia>(2011) 연작을 포함한 <그곳에 나는 있더라>(2012), <여기보다 어딘가에>(2012)와 같은 작업에서부터 2023년의 <Energy planter>와 <에너지의 숨> 등의 2025년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호와 선들을 통해 일정한 흐름 속 존재성을 피력해 왔다면, <안녕의 온도>와 <초록>, <Spring>과 <wait1> 등의 일부는 기호적 도형이 없음에도 심적 파장과 여백이 생성된다.(호기심을 유도하는 <Conversation> 역시 기호들이 없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이처럼 이미 부차적인 장치 없이도 ‘Energetic Flow’, 즉 보이는 것 너머의 풍경을, 보이지 않는 힘과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 작업들이 있다. 기호학적 도형들이 거세된다면 의사전달이 모호해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차라리 신비롭고 사고의 여백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동시대미술(Contemporary Art)에서 에너지가 과연 얼마나 공감 가능한 주제인지도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동시대미술은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을 전제로 한다. 동시대성은 전지구적 미적 현상으로, 집단적 혹은 개별적으로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새로운 방식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문화적 상태로의 역사적 전환에 무게를 둔다. 
또한 동시대성은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고 개별적이면서 타인과 공유되는 경험이다. 때문에 동시대미술은 글로벌 흐름이 만들어내는 맥락과 상호 관련 속에서 미술을 바라본다. 특히 동시대성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당대 환경에 가장 적합한 모더니티를 구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작품의 의미와 가치도 여기서 비롯된다. 동시대미술에서 작품이란 ‘논의’의 매개다. 관객은 이제 무언가를 시각적으로 ‘본다’는 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예술작품의 창조과정에 수평적으로 참여해 작가와 동일한 위치에서 작품을 창조해 나가는 과정상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회적 실천’을 지향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미술, 현재의 관객은 자신을 향해 열린 작품과 놀이하고, 연대하며 새로운 관계들을 창조적으로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동시대미술의 핵심이며 지향점이다. 허면 홍수정의 작업은 어떠한가. 에너지가 동시대미술의 핵심을 관통하는가. 답은 이미 위 기술한 동시대미술과 동시대성 부분에 들어 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중견작가로의 진입을 앞둔 예술가로써의 삶의 의지와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홍수정의 작업에서 찾아낼 수 있는 빼어난 회화성과 정서 또한 방향에 대한 신뢰를 형성한다. 어쨌든 보이는 것 너머의 것들, 그 희망적인 미지의 세계는 그의 작품이 아닌 작가에게 있음은 분명하다.■ 2025.9.8.




 


작가노트 



홍수정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오래 머무른다. 일상 속에서 불현듯 다가오는 낯선 순간, 익숙한 풍경이 다른 얼굴로 다가올 때, 그 사이에서 설명할 수 없는 파동을 느낀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힘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우리 삶을 움직이게 한다. 나는 그 보이지 않는 진동을 ‘에너지’라 부르고, 회화라는 언어로 옮겨내고자 한다.
 나의 작업은 관찰에서 시작된다. 빛이 스며드는 틈, 바람이 흔드는 나뭇잎, 물결이 일으키는 작은 떨림 같은 장면들이 화면의 씨앗이 된다. 그 위에서 선은 반복적으로 이어지며 서로 얽히고, 때로는 덩어리처럼 증식하며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선의 흐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환하는 에너지의 흔적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미세하게 증식하는 형상들이 보이고, 멀리서 보면 색의 파동으로 울림을 만들어낸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순간의 감각이 어떻게 시각적 리듬으로 변주되는지를 탐구한다.
 
 색은 작업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다. 반복되는 선의 집합이 에너지의 움직임을 기록한다면, 색은 그 흐름에 호흡과 감정을 불어넣는다. 색은 선과 겹치며 살아 있는 듯 진동하고, 화면 속에서 서로 충돌하거나 스며들며 또 다른 차원을 열어준다. 나에게 색은 찰나의 반짝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기운을 느끼게 하는 매개체이다.
 나는 우리의 삶이 자연의 순환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나며,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흐름이다. 숲의 새싹이 피어났다 시들고 흙으로 스며드는 순간처럼, 우리의 일상 또한 무수한 반복 속에서 반짝이는 순간들을 품는다. 나의 그림은 바로 이 순간들을 붙잡으려는 동시에, 그것이 다시 흘러가도록 두는 과정에 놓여 있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전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닫힌 결론이 아니라 열린 흐름으로 존재하며, 관람자가 각자의 호흡과 리듬으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에게는 강한 파동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고요한 떨림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작품 앞에서 자신만의 감각을 발견하는 경험이다.
 나에게 회화는 ‘Energetic flow’라는 이름의 여정이다. 반복과 증식, 색과 선, 자연과 호흡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리듬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그 여정의 한 장면이며, 나의 작업이 만들어낸 흐름 속에서 관람자 또한 자신만의 반짝이는 순간을 만나기를 바란다.